다테야마는 일본 도야마현에 위치한 북알프스(히다산맥)의 대표적인 산군으로, 후지산·하쿠산과 함께 일본의 3대 영산..으로 불린다. 주봉 오야마(3,003m)를 중심으로 벳산, 조도산, 마사고다케 등 여러 봉우리가 연결된 산악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일본 내에서도 고산 환경과 급변하는 기상 조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다테야마 알펜루트는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편이지만, 루트를 벗어나면 강풍과 짧은 기상 윈도, 복잡한 적설 구조가 동시에 작용하는 본격적인 고산 환경이 펼쳐진다. 특히 가을과 시즌 초반에는 베이스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설이 쌓이며, 눈사태 위험과 판단 난이도가 크게 높아진다. 이로 인해 다테야마는 일본 백컨트리 스노보더(*백컨트리Backcountry는 사전적으로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오지'를 가리킨다. 백컨트리 뒤에 캠핑이나 스키라는 단어를 붙이면 가공되지 않은 자연에서 즐기는 캠핑이나 스키를 즐긴다는 의미다)와 스키어들 사이에서 '기다림과 판단의 산'으로 불린다.
다테야마에서 배운 백컨트리의 시간 그날도 새벽에 눈을 떴지만 보드는 꺼내지 않았다. 무로도에 도착했을 때 바람은 예보보다 강했고, 능선 위의 눈은 밤새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새벽에 켠 헤드램프 불빛 아래 드러난 눈 표면은 매끈하지 않았다. 바람이 쓸고 간 자리와 쌓인 자리의 결이 달랐고, 작은 능선 하나만 넘어도 눈의 감촉이 바뀌었다. 잠시 서서 풍향을 확인하고, 눈 표면을 손으로 만져본 뒤 가방을 다시 멨다. 그렇게 하루가 시작되었고, 동시에 끝났다. 다테야마에서는 이런 날이 드물지 않다. 산에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오는 날. 그리고 이 산에서는 그런 선택이 실패로 기록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날이 쌓일수록, 다음에 '움직일 수 있는 날'이 더 분명해진다.
산에서 스노보딩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어디를 얼마나 탔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다테야마에서의 백컨트리 스노보딩은 그 질문으로는 시작할 수 없다. 이곳에서는 오히려 "왜 오늘은 타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곧 이 산에서의 하루가 된다.
라이딩보다 길었던 시간 다테야마에서 보낸 시간의 대부분은 라이딩이 아니라 기다림이었다. 예보를 확인하고, 바람의 방향을 계산하고, 고도별 기온 변화를 다시 읽는다. 눈이 내렸다고 해서 곧바로 움직이지 않는다. 특히 가을과 시즌 초반의 신설은 더 그렇다. 일본의 첫눈은 대개 분설 형태로 쌓이며, 이는 파우더 라이딩에는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눈사태 위험을 크게 높인다. 베이스가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신설은 언제든 크랙과 슬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 다테야마 일정에서도 열흘간 머물렀지만 실제로 움직일 수 있었던 날은 단 사흘뿐이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계획을 접고, 루트를 수정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되돌아오는 선택을 반복했다. 겉으로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백컨트리에서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라 과정이다. 못 탄 날들이 쌓이지 않으면, 단 한 번의 턴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 사흘이 오기까지는, '그럴듯해 보이는 날'을 여러 번 지나쳐야 했다. 눈은 충분히 쌓여 있고, 사진으로 보면 완벽한 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날이 있다.
시야가 들쭉날쭉 열렸다 닫히며, 풍속이 순간적으로 치솟고, 눈이 고르게 안정화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날. 다테야마는 이런 '애매한 날'이 많다. 그래서 이 산에서는 '최고의 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확실한 날'을 찾는다.
신설을 기다린다는 것 신설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히 눈이 더 쌓이기를 바라는 일이 아니다. 눈이 어떤 구조로 쌓이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는 일에 가깝다. 첫 신설 이후 베이스가 얼마나 빠르게 만들어지는지, 기온이 영하 몇 ℃ 이하에서 얼마나 유지되는지, 바람이 능선에서 눈을 어디로 옮기는지를 반복해서 확인한다. 출발 전 한 달 가까이 고도별 예보를 매일 여러 차례 확인했고, 첫눈 이후 적설이 어떻게 중첩되는지도 계속 계산했다. 그 과정에서 점점 분명해진 건 '언제 갈 수 있는가'보다 '언제 가면 안 되는가'를 아는 일이었다.
예보를 볼 때 나는 적설량부터 보지 않는다. 먼저 바람을 본다. 다테야마에서는 바람이 곧 지형을 바꾸기 때문이다. 풍향이 바뀌면 같은 사면이 하루 사이에 전혀 다른 성격이 된다. 어떤 사면은 바람에 쓸려 단단해지고, 어떤 사면은 눈이 몰려 두껍게 쌓인다. 그 '두껍게 쌓인 곳'이 바로 가장 매력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곳이 될 수 있다. 바람이 만들어낸 두꺼운 판은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눈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안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온을 본다. 특히 영하권이 '얼마나 오래' 유지되는지가 중요하다. 밤의 최저기온과 낮의 최고기온, 그 차이가 크면 표면이 변하고 결합이 달라진다. 이런 변화가 반복되면 눈층 내부에 예상치 못한 약한 층이 생기기도 한다. 가을 신설은 베이스가 약한 상태에서 이런 층이 빠르게 쌓인다. 그래서 시즌 초반의 파우더는 늘 아름답지만, 동시에 늘 까다롭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판단은 오히려 단순해진다. 처음 예보를 볼 때는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적설량, 기온, 풍속, 시야. 숫자 하나하나에 여지가 남아 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그 여지는 빠르게 사라진다. 바람이 멈추지 않는 날이 이어지고, 밤사이 눈이 재배치된 흔적이 반복되면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다테야마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조건이 나쁠 때가 아니라, 조건이 애매할 때다. '조금만 더 가보면 괜찮을 것 같은 날'이 늘 가장 많은 사고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그런 날일수록 더 빨리 멈춘다. 기다림은 포기가 아니라 판단을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캠핑이 만드는 또 하나의 시간 다테야마에서의 기다림이 더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캠핑이라는 조건 때문이다. 산장에서 머무는 시간과 텐트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전혀 다르다. 고도 2,000m가 넘는 설산에서의 캠핑은 몸의 리듬을 빠르게 바꾼다. 잠은 얕아지고, 체력 소모는 빨라진다. 작은 판단 하나가 다음날 컨디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캠핑은 낭만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현실이다. 바람 방향을 보고 텐트 자리를 잡고, 눈을 다져 바닥을 만들고, 스노월을 쌓아 바람을 막는다. 밤이 되면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천에서 바람이 흔드는 소리, 눈이 날리는 소리, 텐트 폴이 미세하게 버티는 감각. 아침이 오면 텐트 주변을 파내고, 장비를 말리고, 다음날을 위한 동선을 머릿속에 다시 만든다. 이런 과정들이 '라이딩 전'에 먼저 쌓인다.
이런 환경에서는 무리한 하루가 곧바로 일정 전체를 흔든다. 그래서 다테야마에서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보다 '내일도 같은 판단을 할 수 있는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라이딩을 하지 않는 날에도 일과는 있다. 눈 상태를 관찰하고, 바람에 쓸린 사면을 확인하고, 다음날을 위한 루트를 다시 그린다. 겉으로 보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루지만, 실제로는 다음 선택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다테야마가 특히 가혹한 이유 다테야마는 이런 판단을 특히 가혹하게 요구하는 산이다. 접근성은 비교적 좋지만, 알펜루트를 지나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상황은 급변한다. 강풍, 짧은 기상 윈도, 캠핑이 필수인 구조. 이 산에서는 준비가 충분하다는 확신이 현장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어질 수 있다. 다테야마에서는 스노보딩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질문이 시작된다.
"오늘은 정말 움직이는 날일까?"
그리고 그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이 가장 옳은 결정이 된다. 이 산의 특징은 '좋은 날이 드물다'가 아니라 '좋은 날의 조건이 까다롭다'는 데 있다. 풍속이 낮아야 하고, 시야가 확보돼야 하고, 눈이 안정화될 시간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맞아야 한다. 그래서 다테야마에서의 '좋은 날'은 단지 운이 아니라, 기다림과 포기의 누적 위에서 열린다.
한국 스노보더가 산으로 향하는 이유 이런 산을 계속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위치로 돌아온다. 한국에는 빅마운틴이라 부를 만한 지형이 거의 없다. 선수로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은 제한적이고, 선수 생활 이후의 선택지는 더 좁아진다. 그럼에도 많은 스노보더들이 결국 산으로 향한다. 그것은 낭만이나 과시 때문이 아니라, 스노보딩을 오래 지속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프리스타일 선수로 살았던 시간은 분명했고, 명확했다. 점수로 증명하고, 결과로 말하는 세계였다. 하지만 선수 생활이 끝난 이후 스노보딩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더 오래 탈 것인가." "어떻게 더 깊게 남을 것인가." 자연설과 백컨트리는 결과보다 과정을 요구하고, 기술보다 판단을 요구한다. 이 기준은 나이를 먹어도, 환경이 바뀌어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산은 '새로운 무대'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스노보딩의 방식'이 된다.
다테야마는 그 전환을 가장 선명하게 만들어 준 산이다. 이 산에서는 나의 욕심이 드러나고, 나의 성급함이 드러나고, 동시에 내가 지켜야 할 기준도 드러난다. 그 점에서 다테야마는 목적지가 아니라 기준점에 가깝다.
계획을 접는 법을 배우는 산 다테야마는 그런 의미에서 '더 앞으로 가는 법'보다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더 많이 가르친다. 실제로 이번 일정에서도 주봉 오야마에서의 다운힐을 계획했지만, 예상보다 많은 신설로 중간 사면에서 눈사태가 발생했다. 경험이 더 많은 라이더들도 계획을 접고 돌아섰고, 나 역시 그 판단에 따랐다.
오야마를 포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수없이 그려둔 라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컨트리에서 계획은 언제나 '첫 번째 초안'에 불과하다. 산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초안은 수정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나는 대신 조도산과 벳산, 마사고다케에서 가능한 범위의 라인을 선택했고, 그 안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만을 반복했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을 더 많이 택했다.
돌아선 선택은 흔적을 남긴다. 눈 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몸에는 기억이 남는다. 어떤 지점에서 멈췄는지, 왜 그랬는지, 그 판단이 이후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테야마에서는 이런 기억들이 쌓이면서 하나의 기준이 된다. 내려온 한 번의 런보다 내려오지 않은 여러 번의 선택이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내려오는 1분이 만들어지기까지 내려가는 시간은 짧았다. 어떤 라인은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1분을 위해 두 시간을 오르고, 하루를 기다리고, 며칠을 준비했다. 그 짧은 턴 안에는 그날까지의 모든 판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다테야마에서의 라이딩은 화려하지 않다. 대신 조용하고 단단하다.
내려오기 직전의 순간에는 묘한 정적이 흐른다. 긴장이라기보다는 정리된 상태에 가깝다. 이미 그날의 결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때는 '잘 타야 한다'는 생각보다 '이 선택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크게 남는다. 그 질문에 흔들리지 않을 때에만,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내려온 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잘 탔다'가 아니라 '이 선택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였다. 그 한 번의 런은 그날 아침의 결정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며칠 전 돌아섰던 선택, 예보를 읽고 접었던 루트, 바람을 보고 멈췄던 능선 아래의 기준들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래서 다테야마의 한 턴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다.
산이 남기는 기준 다테야마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도, 장비도 아니다. 판단을 미루는 능력, 그리고 포기할 수 있는 기준이다. 이 기준이 없다면 백컨트리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산은 결과를 주지 않는다. 대신 기준을 남긴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다른 산으로 이동할수록 더 중요해진다.
최근 나는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알래스카, 그리고 데날리. 아직 그 산을 말할 단계는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테야마에서 배운 신설을 기다리는 태도와 판단의 기준이 없다면 그곳을 이야기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신설을 기다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기다리는 일이다. 욕심이 앞서는 순간을 넘기고, 불확실함을 견디고, 오늘이 아니라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것. 다테야마는 그 시간을 가장 냉정하게 요구하는 산이었고, 그래서 지금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산으로 남아 있다.
조성우 전 하프파이프 국가대표
전 평창동계올림픽 빅에어 코스위원장
MBC 베이징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해설위원
MBC 파리 하계올림픽 스케이트보드 해설위원
2024 강원 청소년동계올림픽 빅에어 경기위원장
현 랑조투어 (파우더/백컨트리) 투어/캠프 운영
20여 년간 프리스타일 스노보드 선수로 활동했으며, 하프파이프·빅에어·슬로프스타일 종목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왔다.
2011년 이후 자연설과 백컨트리, 빅마운틴 스노보딩으로 활동 영역을 옮겨
일본 북알프스, 스위스 알프스 등에서 투어와 캠핑 기반의 프리라이딩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스노보딩 투어와 빅마운틴·파우더·설산 콘텐츠 제작을 병행하며, 다테야마를 거쳐 알래스카와 데날리로 이어지는 다음 여정을 준비 중이다.
Instagram : @rangzo
YouTube : 조성우의파우더보딩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