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방차산이웃 불행을 내 행운으로 만든 마을이 있다. 이방倚邦은 주변 촌락과 차산이 불태워지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떠오른 두메산골이다. 이방은 고古6대차산 마지막 중심지로 1729년부터 220년 동안 부와 명성을 누렸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대엽종 보이차 규정과 상충하는 소엽종 보이차 생산기지로도 유명한 이방은 제갈공명이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남겨뒀다는 설화가 있는 차산이다.
이방차산을 탐방하기 위해 윈난성 타이.족 자치주 시솽반나西雙版納 주도州都 징홍景洪에 도착했다. 징홍은 윈난성에 뿌리를 둔 25개 소수민족 가운데 타이족이 제일 많이 상주하는 도시다.
후텁지근한 아열대성 기후 속에 다양한 소수민족이 어울려 사는 징홍은 중국이라기보다 동남아시아 문화가 우세한 곳이다. 징홍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란창瀾滄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는 태양과 무더위를 피해 선선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황혼부터 새벽까지 활기를 띤다.
징홍에 내리는 어둠을 밝혀 주는 야시장을 찾았다. 광화문 광장보다 큰 장터에 늘어선 야시장은 빼놓을 수 없는 유혹이다. 국내외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장터는 다양한 토산물과 생활용품, 휴대폰을 비롯한 최신 전자제품까지 사고판다. 흔히 아는 중국풍이 아닌 담백한 먹거리와 다양한 열대과일을 헐값에 맛볼 수 있다. 특히 통째로 굽는 달큼한 호박과 신선한 가지 바비큐는 술을 부른다.
라오스·미얀마·베트남으로 가는 관문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을 오가는 관문인 징홍은 보이차 산지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황실공차로 명성이 높았던 고6대차산과 청나라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던 란창강 건너 서쪽에 형성된 신新6대차산을 탐방하는 베이스캠프 최적지가 징홍이다. 도로와 숙박 환경이 열악한 차산 탐방에 앞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문명지대를 밤새 노닐었다. 동틀 무렵 징홍 도심을 벗어나 산길을 덜컹대며 이방차산으로 갔다.
이방 일대를 지배했던 타이족은 차 생산량이 풍부한 이방을 '차우물茶水井'이란 뜻으로 '모라磨.'라고 불렀다. '탕징唐井'이라고도 했는데 뜻은 동일하다. 360㎢에 달하는 넓은 고산지대에 여러 소수민족이 다툼 없이 어울려 살았던 소박한 산골이 이방 본색이었다. 징홍에서 포장도로로 대략 5시간, 비포장 산길을 2시간 이상 사륜구동으로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촌구석이 이방이다. 특히 우기에 이방을 탐방하려면 산사태로 길이 막히기 일쑤인 것을 고려해 플랜 B를 준비해야 한다.
깡촌이었던 이방이 번성하게 된 계기는 1728년부터 3년 동안 청나라 폭정에 저항한 소수민족 민란 덕분이었다. 그 당시 이방을 실효적으로 지배했던 이彛족 우두머리 카오당짜이曹當齋는 이웃 소수민족 편에 서지 않고 청나라 권력에 붙어 동료 소수민족 학살에 앞장섰다. 배신자 DNA 덕분에 활황을 맞은 이방은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 이후에도 카오당짜이 후손이 30여 년 동안 장악력을 유지했다.
소수민족 배반, 차 권력의 정점에 1728년 타이.족 토사土司 다오정옌刀正.과 하니哈尼족 족장 마부펑麻布朋이 차 집산지에서 청나라 폭정에 맞서 민란을 일으켰다. 동병상련으로 거덩고차산革登古茶山과 지눠基諾고차산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이 단결했다.
진압 작전을 전개한 청나라 군대는 산악 지형과 산악 전투에 취약해 악전고투했다. 소수민족은 물론 청나라도 예상치 못한 지원군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이방 토사 카오당짜이가 이웃 소수민족을 등지고 진압군에 합류했다. 차산을 잘 아는 이족 지도자가 청나라 지원군으로 나서며 전세가 뒤집어졌다.
카오당짜이는 차산과 마을을 모조리 불태우는 청야淸野작전을 앞장서 수행했다. 죽어서 불구덩이에 던져진 사람은 차라리 운이 좋았다. 산 채로 화염에 휩싸인 이들의 비명과 절규는 산골을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넘실대는 불꽃과 시신이 불타는 매캐한 냄새가 차산을 뒤덮었다. 3년에 걸쳐 초토화된 차산에서 살아남은 소수민족은 인종청소를 피해 삶터를 떠나 떠돌이 실향민 신세가 됐다. 처참하게 패배한 소수민족은 복수를 위한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가슴속에 살려뒀다.
민란을 제압한 청나라는 소수민족을 배신하고 우군이 되어 공을 세운 카오당짜이를 이방 토천총土千總으로 발령했다. 토천총은 중앙군사 조직 팔기병八旗兵이 누리는 세금과 노역 면제 같은 특혜가 없는 변방 상비군 녹영병綠營兵에 속했다. 토천총은 중앙정부에서 인장과 임명장을 발급받는 중앙 소속 관료가 아니었다. 지방 총독이 임명하는 토천총은 병부兵部 승인을 받아 세습이 가능했다. 전통적인 세습 족장인 소수민족 토사 제도와 차별되는 토천총은 변경 지역 통제와 지배를 위한 절충형 군사 직책이었다.
청나라가 임명한 최초의 소수민족 관리 보이차를 황실에 조달하기 위해 청나라가 최초로 임명한 소수민족 관리가 된 카오당짜이는 이우易武를 제외한 고6대차산을 통치했다. 이우는 이방보다 먼저 청나라 옹정雍正 황제에게 보이차를 진상하면서 황실 공차 1번지로 알려진 유명 차산이었다.
이방과 이우를 상호 견제시킬 필요가 있었던 청나라는 토천총보다 직급이 낮은 토파총土把總(정칠품正七品)을 임명해 이우차산을 직접 관리하게 했다. 카오당짜이 덕분에 불바다와 피바람을 모면한 이방이 후미진 마을에서 고6대차산 대표로 새롭게 떠올랐다.
카오당짜이 아들이 쓰촨에서 소엽종 차나무를 가져와 대량 이식했다. 이방 소엽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소엽종 차나무의 새싹은 중국 현지에서 '고양이 귀(마오얼둬.耳.)'라고도 불린다. 소엽종 찻잎을 우리면 쓴맛은 적고 부드러운 단맛이 올라온다.
이방에 속한 만송曼松은 대엽종 차나무와 소엽종 차나무가 혼재한 지역으로 이 둘을 섞어 만든 차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우차산에 이어 만송차가 황실공차로 지정됐다. 카오당짜이는 황실에 바치는 공차 조달을 책임졌다.
차 산업생태계를 속속들이 잘 아는 카오당짜이는 권력과 자본에 취약한 차 농민을 보호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그는 관용차 구입을 핑계로 관리가 차 농민을 압박해 저가로 강제 매입한 차를 되팔던 악질 관행을 최초로 금지했다.
동시에 세금 징수 기준을 명확히 공지해 시장 질서를 확립했다. 고용 분쟁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권리와 의무를 명확히 규정해 소모적 분쟁을 방지했다. 카오 집안은 차 산업에 명운을 걸었다. 이방에서 만든 차는 티베트와 홍콩, 마카오로 수출됐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거점으로 동남아시아와 유럽에도 보이차가 진출했다. 녹색 황금을 찾아 가난한 한漢족이 이방차산에 대거 유입됐다.
쓰촨四川에서 이방으로 건너온 한족이 유난히 많았다. 카오당짜이 할아버지도 차 무역을 중개하러 77년 전 이방에 차茶를 사러 왔다가 눌러앉은 쓰촨 출신 한족이었다. 카오당짜이 할아버지는 이족 족장 딸과 혼사를 치렀다. 아들이 없던 이족 족장은 카오당짜이 할아버지를 후계자로 삼았다.
카오曹 가문이 이방차산 일대를 지배하는 기반이 그때 마련됐다. 카오당짜이 아버지도 소수민족과 결혼했다. 이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오당짜이는 한족과 소수민족 피가 흐르는 혼혈이었다. 그 또한 이족 여인과 결혼했다. 중화中華 주류 민족, 한족이라는 과도한 자부심에 매몰된 그는 죄책감 없이 동료 소수민족을 탄압했다. 청나라에 충성한 그는 수비대 사령관으로 승진한 후 1773년 사망했다.
후이족 반란으로 200년 이어온 카오 가문 몰락 카오 가문은 세습 관직을 8대에 걸쳐 이어가며 이방과 흥망성쇠를 함께했다. 청나라 시절 이방차산은 19개 자연부락 인구 9만 명이 넘었다. 봄철에는 외지에서 온 상인과 계절노동 인력까지 가세해 20만 명이 이방차산을 누비고 다녔다.
전성기에 1,000가구가 넘었던 이방은 요즈음 33가구 128명이 살고 있다. 이방을 포함한 13개 마을을 다 합쳐도 고작 222가구에 956명이 살고 있다. 이방이 몰락한 서막은 불이었다.
1856년 두원슈杜文秀가 일으킨 후이回족 반란에 차산에서 살아남은 소수민족 후손도 동참했다. 한풀이하듯 이웃 소수민족이 합세해 이방을 공략했다. 복수는 소수민족 것이 됐다. 불을 불로 되갚아줬다.
128년 전 불로 흥했던 이방은 불로 망하는 신세가 됐다. 1942년 복수심으로 칼을 갈아오던 지눠족이 명맥만 겨우 이어오던 이방을 박살냈다. 사흘 밤낮으로 이어진 대형 화재는 297년 동안 이방을 지배해 오던 카오 가문을 끝장냈다. 대륙의 복수는 때때로 호흡이 길고 잔인했다.
퇴락한 건물 앞에 부서진 채 방치된 돌사자가 적막강산이 된 이방 옛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흔한 개 짖는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쓸쓸함이 넉넉했다. 거리 한 귀퉁이에서 남정네 둘이 장작 패는 소리만 정적을 깨우고 있었다. 3년 만에 찾아온 이방은 여전히 고즈넉한 산골 마을이었다. 신축 가옥이 몇 생겼지만, 옛 정취와 동떨어져 오히려 생뚱맞아 보였다.
카오 가문 후손과 함께 차산으로 걸어갔다. 산비탈은 울창한 숲 대신 황량한 빈터에 차나무만 듬성듬성 보였다. 거목들이 밑동 껍질이 벗겨진 채 말라죽고 있었다. 그는 당연한 어투로 당당히 말했다.
"키가 크고 가지가 무성한 나무 때문에 차나무 일조량이 부족하다. 그런데 정부에선 살아 있는 나무는 벌목을 못 하게 하니, 농약을 주입해 큰 나무들을 고사시킨다."
인간이 가진 욕심 앞에 숲은 우선순위를 양보하고 있었다. 권력에 붙었던 배신자 DNA는 이제는 돈에 붙어 자연을 배신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