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패킹은 늘 산에서 시작됐다. 능선을 따라 오르고, 정상에 텐트를 세운 뒤, 별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이 익숙했다. 하지만 장마가 시작됐다. 거친 오르막 대신 파도 소리를 벗 삼아 걷고 싶었다. 그렇게 발길은 서해를 따라 이어지는 황금해안길로 향했다. 비가 내려도 운치 있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비가 그친 뒤 황금빛 노을을 등에 지고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1,000그루 늘어선 해송숲과 '굴통뿌리'
화성 황금해안길은 제부마니라에서 백미항을 거쳐 궁평항까지 연결된 해안 도보여행길이다. 총연장 17km 가운데 4.4km는 바다 위로 걷는 해상데크길이다. 오랫동안 바다를 가로막던 군 철조망이 사라지면서 이제는 서해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정식 출발점은 1코스인 제부도지만, 일몰이 특히 아름답다는 이야기에 3코스인 궁평항에서 길을 시작했다.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궁평낙조길은 해상데크로 이어졌다. 썰물 시간이어서 데크 아래로 넓은 갯벌이 드러나 있었다. 평일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걷고 있었다. 산에서는 아무렇지 않았던 커다란 배낭이 해안길에서는 괜스레 더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사람이 지나가고 없을 때를 노려 사진을 찍었더니 정작 메모리카드에는 갈매기 사진만 수십 장 쌓였다. 후텁지근한 공기 사이로 간간이 불어오는 해풍은 한여름 에어컨보다 더 반가웠다.
데크길은 곧 울창한 해송숲으로 이어졌다. 해안을 따라 1,000여 그루의 백년송이 늘어선 궁평해송림은 개인적으로 황금해안길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구간이다. 7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도 숲은 넉넉한 그늘을 내어주었다. 바닷바람은 숲 사이를 지나며 더 시원해졌다. 노부부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젊은 커플은 캠핑 의자를 펼쳐 놓은 채 해풍을 만끽하고 있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는 풍경이었다.
약 1km의 해송숲을 지나자 독특한 해안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궁평항 일대는 국가 지질공원으로 지정된 곳인 만큼 안내판을 따라 기암해벽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길게 이어진 해상데크는 '굴통뿌리'를 감싸며 방향을 틀었다. 굴통뿌리는 바다에서 솟아난 큰 바위에 굴이 빼곡히 붙은 모습을 가리키는 궁평리 어민들의 토박이말이다. 굴통뿌리를 지나니 멀리 감투섬이 보였다. 감투섬 아래에도 굴이 붙어 있는지 갈매기 몇 마리가 바위를 맴돌고 있었다.
플랫슈즈 아주머니, 과일가게 아주머니
데크길이 끝나자 백미항에 닿았다. 나들이 나온 여행자들이 스쳐 지나가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마을회관을 지나 백미리희망캠핑장에 도착했다. 평일 캠핑장은 텅 비어 있었다. 관리인은 "원하는 자리에 텐트를 치고, 체크아웃 시간도 신경 쓰지 말라"며 편하게 쉬다 가라고 했다. 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텐트를 세웠다. 아직 하루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군사지역 통제 시간 전에 통과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짐을 덜어낸 배낭을 메고 캠핑장을 나섰다.
주변을 둘러보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숄더백을 멘 아주머니 한 분이 플랫슈즈를 신고 따라오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요?"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건넸다.
"제부도까지 갑니다."
속으로는 함께 걸어가자고 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다. 아주머니와 보조를 맞추다 보면 군사구역 통제 시간보다 늦을 것 같았다.
"나도 제부도까지 가요!"
아주머니는 명쾌하게 대답했지만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 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인사를 남기고 먼저 걸음을 재촉했다. 중간중간 사진을 찍으며 걷다 보니 제법 거리가 벌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주머니가 내 곁을 스쳐 지나가더니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아주머니의 걷기 실력을 얕잡아 본 미안함과 나의 근거 없었던 자신감에 멋쩍은 웃음이 났다.
아직 개통되지 않은 구간에서는 해안길을 벗어나 마을 도로를 따라 우회해야 했다. 단조로운 도로를 걷던 중 달콤한 복숭아 향기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발길은 자연스럽게 과일가게 앞에서 멈췄다. 주인아주머니는 잘 익은 복숭아를 한입 크기로 잘라 내주셨다. 점심도 거른 데다 무더위에 지쳐 입안이 바싹 마르던 참이었다. 시원하고 향긋한 복숭아 한 조각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결국 배낭 무게를 감수한 채 복숭아 한 바구니를 샀다. 아침마다 이 해안길을 걷는다는 아주머니와 자연스럽게 전국의 트레킹 코스를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계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야기에 빠져 30분 넘게 머물렀다. 자칫하면 오후 5시 30분 군사구역 통제 시간에 걸릴 상황이었다. 급히 인사를 나누고 해안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엇나간 일정에 지쳐버린 마음
다행히 출입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5분쯤 지났을까. 맞은편에서 관리 조끼를 입은 어르신과 한 커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중요한 것은 군사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제한 시간 안에 빠져나오는 일이었다. 결국 커플과 함께 구역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어르신이 제부도 주민이라며 차로 제부도까지 태워 주셨다.
평일의 제부도는 한산했다. 제부도를 돌아보기 전에 셔틀버스가 보여 기사님께 막차 시간을 물었다. 시간표에는 오후 8시로 적혀 있었지만, 마지막 운행은 오후 6시 30분이라고 했다. 순간 허탈했다. 겨우 제부도까지 왔는데 제대로 둘러볼 시간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육지로 돌아왔다.
송교리에서 노을을 기다릴까 했지만, 엇나간 일정에 마음까지 지쳐버렸다. 기사님께 백미리희망캠핑장 근처에서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무심한 듯 친절한 기사님은 백미항 앞에 차를 세워 주셨다. 산을 오른 것도 아닌데 몸이 무거웠다. 얼른 씻고 복숭아 하나 베어 물 생각뿐이었다.
캠핑장에 도착해 배낭을 내려놓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노을이 시작됐다.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은 바람을 따라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바다는 황금빛으로 번졌다가 이내 빛을 감추었고, 다시 눈부신 금빛을 펼쳐 보였다. 밀물이 서서히 갯벌을 덮어가자 물결 위를 스치는 석양은 마치 잘게 부서진 황금을 바다에 흩뿌려 놓은 듯 반짝였다.
마침내 해가 구름 너머로 모습을 감추자 캠핑장 사장님이 인사를 건넸다. 낮에 만났던 관리인과 교대하셨다고 했다. 사장님은 나더러 "독채를 쓰는 VIP 손님"이라며 서신면 특산물인 블루베리 한 팩을 선물로 주셨다. 값을 치르겠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끝내 웃으며 손사래를 치셨다. 감사한 마음에 매점에서 뭔가 사려고 했지만, 캠핑장을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운영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답하고 싶었지만 가진 것은 아보카도 샐러드와 작은 맥주 두 캔뿐이었다.
정식 개통 앞두고 개선점 전달
사장님은 황금해안길을 걸어본 소감을 물으셨다. 알고 보니 서신면 이장단협의회 회장을 맡고 계셨다. 정식 개통을 앞두고 임시 운영 기간에 이용객들의 의견을 듣고 개선점을 찾고 있다고 했다. 아직 전 구간을 완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걸으며 느낀 점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한여름의 햇볕이었다. 해상데크에는 그늘이 거의 없었고, 궁평해송림을 제외하면 잠시 쉬어 갈 벤치조차 찾기 어려웠다. 아직 정비되지 않은 약 2.5km의 우회 구간도 아쉬웠다. 여기에 평일 제부도 셔틀버스의 실제 운행시간이 안내와 달랐던 점은 처음 찾은 여행자라면 충분히 당황할 만했다. 사장님도 대부분 공감하며 정식 개통 전까지 보완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새벽 4시, 장맛비가 천둥과 번개를 몰고 텐트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천장을 뚫을 듯 거세게 쏟아졌지만, 산에서 숱하게 겪어온 밤이었다.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텐트 천장이 잠시 환하게 빛났다가 다시 어둠에 잠겼다.
비를 퍼붓던 아침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았다. 배낭을 꾸리고 전날 눈여겨봤던 칼국수집으로 향했다. 백미리는 '백 가지 맛을 낼 만큼 수산물이 풍부한 마을'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 이름을 들었으니 한 가지 맛이라도 보고 떠나야 하지 않을까.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우연히 캠핑장 사장님을 다시 만났다. 사장님은 "VIP 손님 특별 서비스"라며 군사구역 출발지까지 차로 태워 주셨다. 가는 길에 아직 개통되지 않은 구간도 하나하나 소개해 주셨다. 캠핑장 하루 이용만으로 이런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다.
전날 굳게 닫혀 있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가득 채워졌던 바닷물은 물러나고, 갯벌은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듯 생명으로 가득했다. 갈매기들은 느긋하게 바람을 타며 하루를 시작했다. 전날 화려하게 황금빛 석양을 품었던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잔잔했다.
황금해안길은 숨 가쁘게 오르는 산과는 다른 걸음을 가르쳐 준다. 산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법을 알려 준다면, 바다는 잠시 멈춰 서는 법을 알려 준다. 황금빛 노을은 최선을 다해 보낸 하루의 끝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고, 서해의 바람은 조급했던 마음을 천천히 내려놓게 했다. 수도권을 대표하는 해안 도보여행길이라는 이름이 결코 어색하지 않을 황금해안길의 정식 개통을 기대해 본다.

황금해안길 코스 개요
1구간(낙조경관길): 서해 낙조 정면 조망 (5km, 70분)
2구간(소금바다길): 해상데크, 염전, 군사통제구역 포함 (4.5km, 70분)
3구간(궁평낙조길): 해송림, 해상데크 (7.5km, 100분)
황금해안길 체크 포인트!
① 서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심해 도보 이용이 제한될 수 있으므로 물때를 확인한다.
② 그늘막 없는 구간이 길다. 전 구간을 걷는다면 양산이나 차양용 모자를 준비한다.
③ 어린이가 동행한다면 전 구간보다는 일몰 시간에 맞춰 한 구간만 선택한다.
④ 2구간 소금바다길은 오후 5시 30분 이후 군사통제구역 진입이 제한되므로 출발 시 시간을 잘 계산해야 한다. 출입제한 시간에 걸렸다면 우회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
⑤ 현재 구간 전체에 화장실과 임시 주차장이 운영되고 있다.
⑥ 일부 구간(소금바다길 2.5km)은 아직 정비 중이라 해안에서 벗어나 우회해야 한다.
⑦ 11월로 예상되는 정식 개통 후 매년 5월 열리는 화성 뱃놀이축제 기간에 방문한다면 선박체험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