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비껴간 공간은 오래 묻어둔 타임캡슐과도 같다. 박제된 '시간의 껍질'을 한 겹 걷어내면 그 안에서 소박한 '추억의 속살'이 되살아난다.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련한 레트로 감성을 품은 여행지 두 곳을 소개한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촬영지 '합천영상테마파크'

최근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촬영지로 주목받은 합천영상테마파크가 지난해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마치고 관람형 콘텐츠를 대폭 강화한 공간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기존의 외관 위주 세트장에서 한 단계 나아가, 내부까지 직접 들어가 체험할 수 있는 '몰입형 공간'으로 진화했다는 평가다.
총면적 7만8000여㎡, 160여 동의 건물로 구성된 대규모 세트장은 볼거리가 촘촘하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경성로'는 옛 경성역에서 독립문까지 이어지는 직선거리로, 1930년대 경성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다.
고풍스러운 반도호텔은 앤틱 가구와 소품을 활용한 '합천네컷' 촬영 공간으로 변신했고, 옛 은행 금고를 형상화한 광통관은 감각적인 미디어아트 전시와 셀프 스튜디오를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경성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소공로'는 1920년대 상업거리를 재현한 공간이다. 바로 옆 일본식 목조주택 인 '적산가옥로'는 당시 저잣거리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부 관람이 가능해진 양장점과 레코드 가게는 이번 리모델링의 핵심이다. 70~80년대 복고풍 의상을 직접 입어보거나, 아날로그 LP 판에서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당시의 낭만을 오감으로 만끽할 수 있다.
'경성이용원'에서는 전통 이발소를 배경으로 즉석사진 촬영이 가능하며 경성역 오른편에 자리한 '대흥극장'은 1960~70년대 미국 극장 분위기를 담아 관람객이 광고 멘트를 직접 더빙해보는 이색 체험을 선사한다.

넓은 부지가 부담스럽다면 전기차를 이용해 약 20분간 주요 구간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관람의 종착지에서는 모노레일을 타고 청와대 세트장으로 이동한다. 실제의 68% 규모로 축소 재현된 이곳은 집무실과 회의실 등이 실제와 흡사해 각종 정치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로 사랑받고 있다.
영상테마파크 관람 이후에는 인근 명소로 동선을 넓혀보는 것도 좋다.
먼저 도심형 녹지 공간인 정양레포츠공원은 황강변에 조성된 드넓은 녹지 공간으로, 산책로와 운동시설이 갖춰져 있어 가볍게 휴식을 취하기에 알맞다.
이어 해인사로 향하면 분위기는 한층 고요해진다. 가야산 자락에 자리한 해인사는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으로 널리 알려진 천년 고찰이다.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한국 3대 사찰로 꼽히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간직한 우리 불교 문화의 상징적 공간이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충남 서천군 판교면에는 '시간이 멈춘 마을'이라 불리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오래된 잡지에서 본 듯 바랜 간판과 낮은 처마의 집들이 늘어선 골목은 마치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방문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판교마을은 1930년 장항선 판교역이 개통되면서 상업 중심지로 번성했다. 널다리(판교)라 불리던 작은 마을에 역이 들어서자 충남 3대 우시장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상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1980년대 우시장이 사라지고, 장항선 직선화 사업으로 판교역이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마을은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개발에서 비켜난 대신 1970~80년대 풍경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여행의 시작은 옛 판교역이다. 역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는 1930년대부터 이곳을 지켜온 증인이다.
역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반공 방첩' 표어가 희미하게 남은 옛 농협 창고와 판교극장이 나타난다. 주민들은 이곳을 '공관'이라 불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홍보와 반공교육이 이뤄졌고, 동시에 영화 상영과 가수 공연이 열리던 문화공간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2층 적산가옥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지주가 거주하던 집으로 해방 이후에는 여각과 쌀가게, 사진관으로 쓰였다. 지금도 파란 나무문에 적힌 '장미사진관' 간판의 독특한 분위기 덕분에 마을 최고의 포토존으로 꼽힌다.
근처의 동일주조장은 판교면 일대에 막걸리를 공급하던 곳이다. 간판에 적힌 'TEL 45'라는 숫자는 교환수가 전화를 연결해주던 시절의 흔적이다.
마을 곳곳에서 '전화 29번' 같은 옛 표기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집집마다 걸린 "건강이 최고", "복 많이 받으슈" 같은 문패는 주민자치위원회 서각반이 만든 것으로 조용한 골목에 소박한 온기를 더한다.
판교마을에서 시간 여행을 마쳤다면 서천의 또 다른 명소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마량리 동백나무숲은 봄이면 선홍빛 동백이 절경을 이룬다. 동백나무 북방한계선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500년 수령의 동백나무 80여 그루가 숲을 이룬다. 3월과 4월 사이 방문하면 선홍빛 꽃잎이 뚝뚝 떨어진 낙화의 미학을 만끽할 수 있다. 정상에 위치한 '동백정'에서 바라보는 서해 낙조는 놓치지 말아야 할 장관이다.
바다와 숲을 함께 즐기고 싶다면 장항송림산림욕장도 좋다. 해송림과 서해가 어우러진 산책로가 조성돼 있으며 높이 15m·길이 236m의 스카이워크(기벌포 전망대)에 오르면 발아래로 펼쳐지는 숲과 서해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