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대담] ‘국립소방병원 탄생 주역’ 1호들이 말하는 개원 이야기● 국내 첫 소방 전문 공공병원…302병상 규모 출범
● 李 대통령, 8월 11일 국립소방병원 개원 축하
● 초대 병원장 곽영호, 1호 의사·간호사 김태신·김혜선의 열정
● 텅 빈 부지서 4년 만에…서울대병원·소방청·지자체 협력
● 화상·유해물질 노출·PTSD 등 소방공무원 직무 특성 고려
● 전문 인력 수급은 과제…전문의 정원 48명 중 27명 확보
● “지방 의료 한계”…파견·순환근무 등 운영 모델 모색 중
● “‘착한 적자’ 불가피…정부 지원 아래 자생력 확보해야”“마침내 개원하는 국립소방병원이 어느 곳보다 여러분(소방공무원)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치료하는 든든한 안식처가 되길 바랍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임상 역량을 갖춘 서울대병원과 소방의학연구소의 데이터가 결합, 직무 중 발생하는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소방 의학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8월 11일 오후 이재명 대통령은 충북 음성 국립소방병원 개원식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이날은 개원 준비를 시작한 지 4년여 만에 국내 최초 국립소방병원 개원식이 열린 날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의료진을 향해서도 “영웅을 지키는 것이 곧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고 임해 달라”며 감사와 당부를 전했다.
국립소방병원은 국내 최초 소방 전문 공공병원으로 서울대병원이 위탁 운영한다. 302병상 규모로 지어진 이 병원은 직무 특성상 화상이나 외상, 유해물질 노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에 노출되는 소방공무원을 전문적으로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지난해 12월 시범 진료를 시작해 6월 8일 개원했는데, 이날 이 대통령과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 신용한 충북도지사 등 150여 명이 참석해 개원을 축하한 것이다. 충북혁신도시에 들어선 국립소방병원은 지역 공공의료를 책임질 거점병원으로도 기능할 전망이다.
그러나 병원이 문을 열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2022년 개원 준비를 시작한 뒤 병원 건물을 세우고, 의료진을 꾸리고, 진료체계와 조직문화를 정립하는 일까지 모든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외부에 협조를 구할 때도 병원 설립 취지와 진료과목 등을 수차례 설명한 뒤에야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신동아’는 앞서 7월 24일 개원을 이끈 곽영호 초대 병원장과 국립소방병원 ‘1호 의사’인 김태신 진료지원실장, ‘1호 간호사’인 김혜선 진료협력팀장을 만나 개원 과정과 운영 계획에 대해 들었다.
‘1호들’의 대담은 거침이 없었다. 서울대 의대 응급의학교실 교수인 곽 원장과 카이스트 출신으로 서울대병원 진단검사의학과 임상교수인 김 실장의 전문성, 여기에 서울대병원 의료전달체계 뼈대를 세운 김 팀장의 ‘조합’은 국립소방병원의 미래를 짐작하게 했다. 화려한 개원식 이면에는 수년간 묵묵히 정진한 이들의 열정과 헌신, 고단함도 담겨 있었다. 다음은 이들과의 일문일답이다.
“개원은 목표를 이룬 순간이자 새로운 출발점”
국립소방병원이 문을 열었다. 소방공무원들과 가족에게는 의미가 크겠다.곽영호 국립소방병원장(이하 곽영호): “그렇다. 소방공무원 치료의 목표는 단순한 일상 복귀가 아니라 현장 복귀다. 같은 근골격계 손상 환자라도 일상 복귀를 목표로 하는 치료와 수십 kg의 보호장비를 메고 다시 화재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치료는 달라야 한다.
물론 일반 의료기관도 개별 질환을 치료할 수 있지만 소방공무원의 직무 특성에 기반한 전문 의료체계는 별도로 필요하다. 국립소방병원은 예방부터 치료와 재활, 직무 복귀까지 잇는 소방의료체계의 토대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소방공무원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곧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개원을 맞는 감회도 크겠는데.곽영호: “2022년 개원준비단이 활동을 시작했으니 병원 문을 열기까지 4년 가까이 걸렸다. 지난해 12월 24일 시범 진료를 시작하면서 소방공무원을 첫 환자로 맞았고, 올해 3월부터는 지역 주민들도 환자로 맞아 진료를 시작했다. 실제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모습을 보니 ‘4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 감회가 남달랐다. 개원은 하나의 목표를 이룬 순간인 동시에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하다. 환자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필요한 진료 기능을 하나씩 확대해 나가려고 한다.”
김혜선 진료협력팀장(이하 김혜선): “2022년 11월 국립소방병원 개원준비단에 합류했을 때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당시 준비단은 세종시에 있었는데, (곽영호) 병원장님과 저를 포함해 5명이 진료기획팀, 운영기획팀 두 직제로 나눠 일했다.
당시는 ‘국립소방병원’이라는 이름만 정해졌을 뿐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았다. ‘개원을 준비한다’는 미션을 어떻게 수행할지 함께 밑그림을 그렸고, 전국 의료기관을 찾아 배우며 병원 모습을 만들었다. 안전모를 쓰고 공사 현장도 수없이 오갔다. 지난해 12월 현판식에서 병원 외벽에 ‘국립소방병원’이라는 이름이 걸리는 걸 보니 그간의 시간이 한꺼번에 떠오르더라. 서울대병원과 소방청, 지자체, 지역 의료기관 등 수많은 기관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던 시간이었다.”
김태신 진료협력실장(이하 김태신): “이미 완성된 시스템에 따라 운영하는 것과 백지 상태에서 하나하나 원칙을 세우는 일은 정말 다르더라. 개인적으로 소방 의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관심이 크다. 소방공무원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헌신하는데, 정작 이들의 건강과 직업병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저에게 국립소방병원은 새로운 병원을 만드는 곳인 동시에 새로운 의학 분야를 개척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쌓은 경험과 연구가 소방공무원의 건강은 물론 지역의료와 의학 발전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십인십색(十人十色) 구성원들…‘소통’이라는 용광로
김 실장 말처럼,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료 체계를 정립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았을 거 같다.곽영호: “의료진과 장비가 있다고 바로 병원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응급진료와 수술, 입원, 감염관리 등이 안전하게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개원 전부터 모의훈련을 반복한 것도 그 때문이다. 더 힘들었던 건 서로 다른 병원에서 온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 일이었다. 각자가 몸담았던 병원마다 업무 분장과 문화가 제각각이다 보니 혼란과 갈등도 없진 않았다. 그렇다고 위에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거나, (위탁 운영하는) 서울대병원 원칙을 그대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구성원과 대화하면서 병원 사정에 맞는 협업체계를 하나씩 만들어갔다.”
김태신: “그렇다. 저를 포함해 서울대병원에서 파견된 직원들은 익숙했던 업무 방식을 내려놔야 했다. 가령 서울대병원 검사실에는 의사만 20명 가까이 있고 임상병리사도 200명이 넘지만 이곳은 훨씬 적다. 최근에는 수혈용 혈액제제 공급 문제를 통해 지역의료의 현실을 절감했다. 대도시는 지역 내 적십자 혈액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을 수 있지만 (소방병원이 있는) 음성은 가장 가까운 혈액원이 청주에 있어 사정이 다르다. 응급수술처럼 혈액이 즉시 필요한 상황에서 공급이 늦어지면 환자 안전과 직결될 수 있다. 지역의료는 대도시 의료의 축소판이 아니었다. 인력과 물류, 주변 의료기관과의 관계까지 고려해 새로 설계해야 했다.”
김혜선: “처음에는 서울대병원이라는 든든한 기반이 있으니 병원을 만드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울대병원의 좋은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안 되더라. 병원 규모나 특성도 다르고, 무엇보다 소방공무원의 직무 특성을 고려해야 하는 만큼 하나하나 바꿔 설계해야 했다. 게다가 서로 다른 병원에서 온 직원들을 동일한 기준 아래 표준화된 교육을 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솔직히 지금도 완성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계속 조정하면서 우리 병원만의 방식을 만들어가야 한다.”
간호사 출신인 김 팀장은 조직과 시스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었다. 김 팀장은 2007년 서울대병원 재직 시절 진료과별 외래환자 회송(回送) 프로토콜과 의료기관 정보교류 시스템 등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한 베테랑으로 잘 알려진 인물. 대학원에서 의료경영과 행정학을 전공한 그가 개원 준비단을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혜선: “새로운 조직과 시스템을 만드는 데 보람을 느낀다. 서울대병원에서도 간호간병통합서비스제도, 혁신의료기술연구소 등 새로운 제도와 조직 출범과 운영을 경험했고, 정부 정책과 거버넌스에 대한 관심도 많다. 병원 개원 준비부터 운영까지 이해관계가 다른 조직들이 어떻게 협력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기제가 작동하는지 들여다보며 연구하고 싶어 지원했다. 경험과 연구가 연결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전문 인력 수급은 과제…전문의 정원 48명 중 27명 확보
병원 문은 열었지만 국립소방병원의 진료 기능이 정상 궤도에 오른 것은 아니다. 당초 전문의 48명을 확보할 계획이었으나 실제 채용 인원은 이날 기준 27명에 그쳤다. 다수 진료과가 정원을 채우지 못했고, 응급의학과 전문의도 2명뿐이어서 응급실은 평일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만 운영되고 있다. 전체 302병상 가운데 가동 중인 병상도 108개에 불과했다.
병상과 응급실을 충분히 가동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의료 인력 부족인가.곽영호: “가장 부족한 건 의사다. 간호직은 경쟁률이 5대 1을 넘을 정도로 지원자가 많았고, 사무직 등도 운영에 필요한 인원을 뽑았다. 반면 의정(醫政) 갈등으로 전문의 배출이 끊긴 데다 수도권 선호까지 겹치면서 ‘의사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이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지 않나. 전문의 인건비는 크게 올랐는데 병원 예산은 그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현재 ‘파트타임’까지 합쳐 의사를 37명 확보했다. 최근 응급의학과 전문의 4명을 추가로 채용하기로 한 만큼 9월 중순부터는 응급실을 24시간 운영할 계획이다.”
김태신: “주변 의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에 올지 결정하기까지는 어려워했지만, 막상 온 이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더라. 물론 지방 병원이 모든 분야의 전문의를 상근 인력으로 갖추는 데는 현실적 한계가 있다. 좀 더 유연한 운영 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서울대병원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파견·순환근무를 활성화하고, 원격 협진이나 원활한 전원 체계도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 이런 유연한 운영 모델은 학계에서도 논의되고 있는 만큼 국립소방병원에서 직접 적용하고 발전시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김혜선: “간호 인력의 경우 인원 확보보다는 어떤 경험과 전문성을 갖췄는지가 중요하다. 적시적소에 인력을 배치해 전문성을 키우는 게 매우 중요하다. 특히 국립소방병원은 아직 수련병원이 아니고 전공의가 없는 만큼 진료 지원을 하는 간호사를 더욱 체계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
자체 교육은 물론 서울대병원 위탁교육을 통해 국립소방병원의 철학과 진료체계를 이해하는 인력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단순히 많이 뽑는 것보다 제대로 성장시키고 오래 일할 수 있게 하는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착한 적자’ 불가피…정부 지원 아래 자생력 확보해야”
병원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으려면 정부 지원도 필요해 보인다.곽영호: “그렇다. 국립소방병원은 ‘착한 적자’를 피하기 어려운 구조다. 매출이 높게 잡히는 암 환자를 주로 받는 병원도 아니고, 비급여 진료를 늘려 수익을 높일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게다가 영안실이 없어 진료 외 방식으로 수익을 내기도 어렵다. 국가가 소방공무원의 건강을 책임지겠다고 만든 병원인 만큼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재정적·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도 지원에만 기대려는 것은 아니다. 소방공무원과 지역 주민의 신뢰를 얻어 외래 및 입원 환자를 늘리고, 응급실도 안정적으로 운영해 최대한 빨리 자생력을 갖추려 한다. 다만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김태신: “서울대병원과 인적 교류도 더 활발해졌으면 한다. 의사뿐 아니라 이곳에서 채용한 간호사와 임상병리사가 서울대병원에서 단기간이라도 체계적 교육을 받았으면 한다. 다녀온 직원들은 ‘나도 서울대병원 그룹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고, 그 경험을 다시 이곳에 퍼뜨릴 수 있다. 이는 신생 병원이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교통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수도권은 물론 충북과 충남을 잇는 대중교통이 부족해 환자도 찾기 어렵고, 의료진을 확보하고 오래 머물게 하는 데도 장애가 된다.”
병원을 운영하며 마주한 ‘뜻밖의 문제’는 없었나.김혜선: “지역 의료기관과의 관계가 중요한 과제였다. 환자와 의료 인력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지 지역 병원에서 경계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병원 환자를 끌어오는 병원이 아니다. 지역 의료기관과 경쟁하기보다는 각 기관이 잘할 수 있는 역할을 나누고 서로 연결하는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는 게 ‘윈윈 전략’이다. 지역 병원이 먼저 환자를 진료하고, 정밀검사나 입원·수술 등 전문 진료가 필요한 환자를 국립소방병원과 연계할 수 있도록 협력체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개원 직후부터 충청권 의료기관을 찾아 소통하면서 국립소방병원의 역할과 운영 취지를 설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단순히 협약서 한 장을 쓰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협력이 지역의료의 경쟁력을 높이고, 궁극적으로는 환자의 안전과 의료서비스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곽영호: “이곳 음성에는 외국인노동자가 많다. 최근에는 체류 자격이 없는 외국인노동자가 화상을 입어 우리 병원에 입원했다. 화상 전문의가 있어 치료는 할 수 있었지만 산재 처리와 진료비 문제는 또 다른 과제였다. 국립병원인 만큼 취약한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지만 병원이 모든 비용과 행정 문제를 떠안는 방식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응급실에도 작업 중 화상을 입거나 사다리에서 떨어져 다친 외국인 환자가 들어오고 있다. 음성군의 외국인 지원기관과 협력해 치료와 산재, 진료비 문제를 함께 풀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