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여러분, 삼성을 병들게 하는 건 동행노조가 아닙니다."
21일 오후 삼성전자 서초사옥으로 이어지는 서울 강남대로. 삼성전자 디바이스경험(DX)부문 직원 중심 노동조합인 동행노조 조합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경찰 추산 2100명이 강남역에서 서초사옥으로 향하며 "정현호·박학규는 사퇴하라", "경영 실패 책임져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을 향해 자신들의 집단행동이 삼성전자를 위기에 빠뜨리는 원인이 아니라며 호소하기도 했다.
금요일 퇴근시간을 앞두고 대규모 인원이 강남 한복판을 행진하면서 주변 도로 곳곳에서는 차량 흐름이 끊겼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지난 5월 임금협상이 이미 타결된 뒤 노조가 다시 거리로 나오면서 집회의 명분과 방식이 적절했는지를 두고도 뒷말이 나오는 상황이다.
퇴근길 강남대로 메운 행진대열…경영진 사퇴 촉구
오후 4시께 강남역을 출발한 행진 대열은 삼성전자 서초사옥 방향으로 길게 늘어섰다. 조합원들은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구호에 맞춰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과 박학규 사업지원실장 사장의 이름을 반복해서 외쳤다. "경영 실패 책임져라"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강남역과 서초사옥 주변 도로 일부도 통제됐다. 수천 명이 금요일 퇴근시간을 앞두고 도심을 행진하면서 곳곳에서 차량 흐름이 더뎌졌다. 경찰은 이날 오후 8시까지 일대 교통을 관리할 예정이다. 퇴근 차량이 몰리는 시간까지 통제가 이어질 예정인 만큼 시민 불편도 예상된다.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의 육성도 흘러나왔다. "삼성이 초일류 기업이 되는 날 모든 열매와 보람은 함께 땀 흘린 임직원들과 협력업체가 골고루 나눠 가지게 될 것"이라는 과거 발언이다. 노조는 이 메시지를 반복해 내보내며 DX 구성원의 과거 기여에 걸맞은 보상을 요구했다.
서초사옥 앞에는 이재용 회장과 정현호 부회장, 박학규 사장, 노태문 대표이사 겸 DX부문장 등 경영진의 이름을 붙인 의자도 마련됐다. 동행노조는 이들에게 집회 참석과 직접 대화를 요구하는 초청장을 보냈지만 이날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본집회에 들어가자 발언 수위는 한층 높아졌다. 노조는 "오늘 우리가 서초까지 온 이유는 단순히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며 "삼성전자 DX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누가 이런 의사결정을 했고 그 결과에 누가 책임질 것인지 묻기 위해 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회사가 비용 절감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노조는 재료비와 투자비를 줄인 데 이어 AX(AI 전환)를 앞세워 인력 효율화에 나서고 있다며 "사람과 기술에 대한 투자를 비용으로만 바라보는 근시안적인 경영을 멈추라"고 촉구했다.
동행노조는 또 "오늘은 서초였다. 다음은 한남"이라며 추가 행동도 예고했다. 회사가 요구에 답하지 않을 경우 집단행동 수위를 더 높이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임협 타결 3개월 만에 거리로…적법성 공방
집회 현장의 열기와 별개로 이번 집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삼성전자 노사는 지난 5월27일 올해 임금협상을 최종 타결했다. 당시 회사는 DX부문 및 CSS사업팀 직원에게 1인당 600만원 상당의 자사주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지난달 직원 4만9345명에게 1인당 자사주 22주와 현금 17만3920원을 지급했다. 이후 주가가 오르면서 실제 지급 가치는 1인당 약 717만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동행노조는 기존 합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올해 임금협상안을 전면 재검토하고 DX 직원 1인당 자사주 1000주 수준의 추가 보상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노조는 이날도 "이제 1000주라는 숫자 뒤에 숨지 말라"며 해당 요구만 부각되는 데 강하게 반발했다. 돈을 더 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DX의 과거 기여도를 다시 평가하고 임원과 직원 간 보상 기준의 차이를 바로잡으라는 것이 집회의 본질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측의 시각은 다르다. 이미 임금협상을 통해 노사 합의가 이뤄졌는데 이를 다시 문제 삼으며 추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명분이 약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DX부문이 올해 2분기 적자를 기록하는 등 수익성 악화에 직면한 상황에서 대규모 자사주 지급을 요구하는 것도 경영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판단이다.
집회 참가 방식도 논란거리다. 조합원들은 개인 연차와 삼성전자의 사내 휴무 제도인 '디데이(D-Day)' 등을 활용해 이날 집회에 참석했다. 사측은 동행노조가 교섭 결렬과 노동위원회 조정, 조합원 찬반투표 등 쟁의행위에 필요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근무시간 중 대규모 행동에 나섰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사측에서는 이를 사실상의 '우회 파업'으로 보고 있다. 이미 임금협상이 타결된 만큼 같은 사안을 놓고 다시 집단행동을 벌이는 것이 노사 간 평화의무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다만 동행노조는 연차와 D-Day를 활용한 자발적 집회 참가인 만큼 쟁의행위와는 다르다는 입장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미 임금협상이 타결된 상황에서 추가 집단행동이 이어진 점은 우려스럽다"며 "현재 DX부문이 실적 회복에 힘을 쏟아야 하는 만큼 노사 모두가 경영 정상화와 경쟁력 회복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