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새 연준 의장에 케빈 워시를 지명했다. 워시는 ‘기준금리 인하’와 ‘양적긴축’을 동시에 추진하려 한다. 이는 장기금리 급등으로 트럼프노믹스의 최대 뇌관이 될 수도 있다.지난해 말부터 미국 시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차기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으로 누구를 지명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케빈 해싯 전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이었다. 해싯은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5월 당시 ‘셧다운 조기 종료’를 주창하던 트럼프에게 아부하기 위해 사실상 데이터 조작까지 감행했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연준의 금리 결정에 당연히 개입해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중앙은행의 독립성’도 노골적으로 부정한 바 있다. 트럼프는 3.5~3.75%의 기준금리를 1% 이하 수준까지 신속하게 내릴 연준 의장을 찾고 있었다. 제롬 파월 의장처럼 ‘경제 데이터로 볼 때 기준금리 인하는 물가를 다시 올릴 것’이라며 버틸 자는 후보 명단에서 무조건 걸러냈다. 해싯은 그의 재능(‘천부적 아부꾼’)으로 볼 때 트럼프의 연준 의장으로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1월30일 트럼프가 지명한 사람은 케빈 워시. 시장은 ‘최악을 피했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한편 경악하기도 했다. 올해 55세인 워시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인 2006년부터 2011년까지 연준 이사를 지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연준의 대응(JP모건체이스의 베어스턴스 인수, 초대형 보험사 AIG에 대한 구제금융)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중앙은행가’로서 실력과 명망을 가진 워시는, 트럼프의 말썽 많은 인선(人選) 중에서는 가장 ‘멀쩡한’ 편이다. 그렇다면 경악한 이유는 뭘까? 워시가 이른바 ‘인플레이션 매파(inflation hawk)’로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매파’는 물가안정을 연준의 최우선 목표로 두고 인플레이션의 흔적만 봐도 금리인상을 밀어붙이는 일군의 연준 이사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워시는 세계 금융위기와 대침체로 물가가 오르기는커녕 내리는 상황에서도 금리인하에 반대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연준에 대한 트럼프의 금리인하 압박에 공개적으로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워시는 이런 변절에 대해 나름 이론적 근거를 갖고 있다. 그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규제완화 및 인공지능(AI) 발전에 힘입어 미국 경제의 생산성이 급격히 발전할 것이라고 본다. 생산성 향상으로 재화와 서비스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늘면 수요가 많아도 물가는 오르지 않거나 심지어 떨어질 수도 있다. 이 논리를 밀고 나가면서, 심지어 ‘트럼프 관세’로 물가가 잠시 오르더라도 지속적 인플레이션으로 번질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연준은 기준금리를 확실하게 내려 기업들이 생산성 향상에 투자하도록 해야 한다. 생산성만 올리면 인플레이션의 뿌리까지 제거해버릴 수 있으니까. 미국 주류 학계는 워시의 이런 아이디어를 대체로 긍정하지 않는다. AI가 생산성 부문에서 앞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지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고, 규제완화 정책 역시 아직 눈에 보이는 경제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워시에겐 물가를 잡을, 그만의 무기가 있다. ‘양적긴축(QT)’이다.
연준은 2007~2008년 세계 금융위기 및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민간은행들이 보유한 미국 장기 국채(만기 10년 이상)를 대량매입했다. 이른바 ‘양적완화(QE)’다. 양적완화는 두 측면에서 거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연준은 매입한 미국채를 보유하게 되므로 자산(assets)이 증가했다. 연준의 자산(미국 국채가 대부분을 점유)은 2008년 9000억 달러에서 2022년 9조 달러까지 불었는데 최근에도 6조 달러 초반대에 이른다. 다른 한편 미국 국채를 연준에 매각한 금융기관들엔 달러 유동성이 쌓였다. 이 돈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의 주식과 부동산으로 넘쳐나며 글로벌 차원에서 금리가 내리는 한편 자산 가격은 폭등했다.
워시는 인플레이션이 ‘공급부족’이나 ‘임금 상승’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돈이 너무 많이 풀려서(유동성 과잉)’ 발생한다고 믿는 고전적 통화주의자에 가깝다. 그래서 2021년 하반기 이후 격심한 인플레이션의 근본적 원인을 금리가 아니라 유동성 과잉으로 진단한다.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역시 유동성 증가로 정부가 더 쉽고 더 싸게 돈을 빌려 재정지출을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유동성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연준이 물가안정을 위해 수행해야 할 가장 긴급한 임무는 달러 유동성 축소다. 연준은 보유 중인 미국 국채를 민간에 내다 파는 방법으로 시중의 유동성을 회수해야 한다(양적긴축). 워시는 기준금리 대폭 인하와 양적긴축을 병행하면 물가를 자극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두 가지 과제 모두 고난도
이론적으론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워시가 ‘금리인하+양적긴축’을 실제로 시행했을 때 가장 격분할 이는 트럼프일 가능성이 크다. 연준이 보유한 미국채 대부분은 만기 10년 이상의 장기 국채다. 연준이 장기 국채를 대량매각하면,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해 이 채권 가격은 하락한다. 장기 국채 가격의 하락은 장기 국채금리(수익률) 상승과 같은 말이다(〈시사IN〉 제840호 ‘‘싼 돈의 시대’에서 ‘비싼 돈의 시대’로?’ 기사 참조).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런저런 장기 대출금리들은 미국채 금리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기업의 투자자금 대출’ ‘부동산담보 대출’ ‘자동차 대출’ 등 시민들의 경제생활에 중요한 자금거래는 장기 미국채 금리와 연동되어 있다. 또한 장기금리가 오르면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의 가치는 경향적으로 떨어진다. 즉, 워시가 기준금리를 내려도 시민들의 ‘내 집’ 대출이자는 오히려 오르는 가운데 집값이 하락하는 기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의 승리를 대단히 어렵게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연준 의장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치는 기준금리는 길게 잡아도 1년 이내의 단기금리들이나 움직일 뿐이다.
또한 달러 유동성이 줄어들면 달러의 가치는 오른다. 글로벌 투자자들 입장에선 한국 등 미국 이외 국가의 자산에 투자했던 돈을 수익률 높은 미국 채권시장으로 옮길 강력한 유인이 발생한다. 환율상승(원화 약세)까지 동반될 수 있다.
워시가 새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다면 그는 앞으로 4년 동안 두 가지의 곡예를 부려야 한다. 우선, 양적긴축과 동시에 장기 국채금리의 상승을 막아야 한다. 술 마시고 운전대에 올랐으나 음주운전은 하지 않는 수준의 난이도다. 그러나 더 어려운 일이 있다. 경제 데이터가 ‘기준금리 인하 불가’로 나오더라도 워시는 트럼프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연준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트럼프를 거스른다면? 트럼프는 ‘배신자’를 그냥 두는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케빈 워시는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와 본회의 인준 표결을 거쳐야 한다. 모든 절차를 통과할 경우 오는 5월 제롬 파월 의장의 임기 종료와 함께 연준 의장에 취임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