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풍을 타고 성장하던 유럽 해상풍력 시장은 최근 침체기를 겪었다. 위기 속에서 게임체인저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덴마크가 30여 년간 쌓아올린 에너지 민주주의의 토대는 무엇일까.명실상부한 기후위기 시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선택의 영역을 넘어선 생존 과제다. 지지부진한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를 끌어올릴 돌파구가 절실한 가운데, 해상풍력이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2025년 3월 정부는 ‘해상풍력 보급 촉진 및 산업육성에 관한 특별법(해상풍력법)’을 제정하고,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세계 최대 규모(8.2GW)의 해상풍력 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2030년까지 해상풍력 보급 규모를 10.5GW로 확대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다.화려한 비전과 달리 오늘날 한국의 해상풍력 성적표는 초라하다. 2025년 11월 기준 국내에서 상업 운전 중인 해상풍력 단지는 11곳, 총 0.35GW 규모로 목표 대비 약 3.3%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에게 해상풍력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다. 2026년 1월 〈시사IN〉은 한국보다 한발 앞서 해상풍력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타이완과 덴마크를 찾아갔다. 지난 호(제960호) 타이완에 이어 이번 호에서 덴마크의 사례를 살펴본다. 덴마크는 1985년, 원자력발전을 에너지 정책에서 완전히 퇴출시킨 이후 해상풍력을 비롯한 재생에너지에 사활을 걸었다. 이들은 ‘해상풍력은 비싸고 상용화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 1991년, 세계 최초로 해상풍력 단지를 설립하며 유럽의 ‘바람 발전소’로 거듭났다. 덴마크에서 재생에너지 전환은 당파에 휩쓸리는 ‘정책’이 아니라 초당적 합의에 따른 ‘국가의 의무’다. 현재 덴마크 전체 전력의 50% 이상이 육상·해상 풍력에서 나온다.훈풍을 타고 성장하던 유럽 해상풍력 시장은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금리인상, 공급망 악화 등 악재 속에서 전에 없던 침체기를 겪었다. 덴마크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입찰제도를 재조정하고 아래로부터 학습된 ‘에너지 민주주의’ 기술을 벼르며 다시 해상풍력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위기 속에서 게임체인저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덴마크가 30여 년간 쌓아올린 정치적·사회적 토대는 이제 막 해상풍력 시장으로 나아가는 한국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까. 천둥의 신 ‘토르’가 지나간 자리에 겨울이 왔다. 2021년, 1GW급 덴마크 해상풍력 단지 ‘토르’ 프로젝트는 대흥행 속에 막을 내렸다. 역대 가장 큰 규모의 해상풍력 발전단지였던 토르 프로젝트는 정부 입찰에 참가한 6개 개발사 모두 ‘정부 지원금 0원’을 써내며 경쟁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부에 수익의 일부를 나눠주는 ‘마이너스 경매’를 했다. 그만큼 모두가 사업 성공을 확신했다. 해상풍력 시장이 성장하고 전력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발전단가 역시 몇 년 새 빠른 속도로 낮아지고 있었다. 수익에 대한 기대를 품는 것이 당연하던, 시장에 훈풍이 불던 시기다.
하지만 고작 3년 만에 업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2024년 12월, 덴마크 정부는 의욕적으로 토르 프로젝트의 3배에 달하는 3GW급 ‘북해 I’ 프로젝트 입찰을 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입찰에 응한 기업이 단 한 곳도 없었고 정부 관계자와 업계 모두 충격에 빠졌다. 덴마크만의 일이 아니었다. 영국·독일·네덜란드 등 신흥 해상풍력 국가에서도 연쇄적으로 무응찰 사태가 이어졌다. 이유는 하나였다. 수지가 맞지 않았다.
“시장의 위험은 진화한다”
에너지 기업 ‘바텐팔(Vattenfall)’에서 근무하는 야코브 카마라 대외협력 매니저는 지난해 4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럽해상풍력 박람회 ‘윈드유럽(Wind Europe)’을 떠올리며 “풍력 우울증이라고 할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라고 회상했다. “해상풍력을 어떻게든 다시 살려야 한다는 공감대는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어떤 나라도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인터뷰를 나누는 그의 등 뒤로 2019년 완공된 600MW 규모의 크리거스 플락(Kriegers Flak) 해상풍력 단지 사진이 보였다. 완공 당시 덴마크에서 가장 큰 해상풍력 단지였던 크리거스 플락은 독일과 덴마크의 전력망을 연결하는 기술혁신을 이룬 사례이자, 터빈 하부구조물에 해조류 양식업을 시도하는 ‘윈앳시(WIN@SEA)’ 프로젝트의 실험실이었으며, 이익공유제를 통해 수익을 주민들과 나누는 주민 참여 사업으로 주목받았다. 당시 업계에서 가장 낮은 입찰가로 사업을 따내며 해상풍력 업계에 새로운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킨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좋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과 에너지 가격이 오르고, 전 세계적 금리인상으로 부채상환 비용이 치솟기 시작했다.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해상풍력은 비용의 80% 이상이 외부 자본(부채)일 만큼 대출 비중이 높다. 가파른 이자 상승은 당장 비용 압박으로 이어졌다. 터빈 제조사들의 손실이 누적되면서 장비 공급이 지연되는 공급망 병목현상도 벌어졌다. ‘보조금 없는 해상풍력’ 시대가 열릴 거라는 장밋빛 기대가 꺾였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성숙한 시장으로 보였던 유럽의 해상풍력 시장이 여전히 ‘안전장치’가 필요한 취약성을 가진 것이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시적 위기가 해상풍력 시장의 장기적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해상풍력 에너지 정책 전문가인 레나 키칭 덴마크 공과대학 교수는 위기 이후 다시 안정을 찾아가는 지금의 시장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난항을 겪은 경매들은 해상풍력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정책 입안자들이 지나치게 야심이 있었거나 시장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다. 에너지 자립을 위한 미래 기술로서 해상풍력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 위기는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시장은 여전히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있다. 덴마크 정부가 (개발사 수익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입찰 설계를 조정하자 다시 경매에 참가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둘째, 무리한 조건에 입찰하지 않는 것 역시 업계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올바른 결정이다. 즉, 시장이 건강하게 운영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다.”
레나 키칭 교수는 “시장의 위험은 진화한다”라고 말했다. “초기 단계에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를 보호하듯 (해상풍력 분야를) 적극 보호해주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더 많은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는데, 이때 시장이 스스로 설 수 있게 해야 한다.”
역사가 3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유럽의 해상풍력 시장은 이제 막 첫 번째 ‘성장통’을 겪은 셈이다. 하지만 한국 같은 재생에너지 초기 시장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고 키칭 교수는 덧붙였다. 정책의 일관성이다. 시장은 ‘예측 가능성’ 위에서 성장하기 때문이다. 종잡을 수 없는 규칙이 적용되는 운동장에서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 선수는 없다. 정권교체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인 에너지 정책을 추진할 것. 이것은 덴마크 해상풍력 시장이 지금처럼 단단한 기반을 갖게 된 첫 번째 비결이다.
녹색에너지, 선택 아닌 국가의 의무
무응찰 사태 이후 덴마크 에너지청(DEA·Danish Energy Agency)은 재빠르게 17개 관련 기업 및 이해관계자들과 면담하고 제3자 컨설팅을 받아 무응찰 원인을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에너지기후부(Ministry of Energy and Climate) 산하 기관인 DEA는 덴마크 에너지 관련 정책 전반을 관리·집행하는 에너지 전환의 실무자 역할을 한다. 덴마크는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원전 건설 계획을 구체화했지만 국민들은 ‘원자력발전? 사양할게요(Atomkraft? Nej tak)’라는 반핵 운동을 벌이며 거센 반대를 이어갔다. 이에 덴마크 의회는 1985년, ‘원자력 금지 결의안’을 채택하고 앞으로 덴마크 에너지 계획에서 원자력을 제외한다는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또한 북해의 유전을 바탕으로 한때 EU 최대 석유 생산국이기도 했던 덴마크는 2020년 12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2050년까지 모든 석유와 가스 생산을 중단하겠다는 대담한 결정을 하기도 했다.
에너지청은 이런 배경하에서 정부가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인 에너지 정책을 집행한다. 시장 관계자들과 직접 소통하며 현장의 변수를 포착해 해상풍력 제도를 재조정하고, 원스톱숍(One stop shop) 제도를 통해 계획 단계에서부터 부처 간 이해관계를 파악해 인허가 과정 전반을 ‘매끄럽게’ 조정한다. 원스톱숍 제도는 부처 간 갈등이 남아 있는 상태로 입찰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덴마크만의 제도다. 각 부처 간 해상풍력 단지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사업 후반에 갈등으로 확대될 경우 건설이 지연되면서 사업 전체가 불확실성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비용 상승은 개발사뿐만 아니라 소비자, 혹은 사회 전체의 손해로 이어진다.
‘북해 I’ 프로젝트 실패 후 6개월 만에 덴마크 의회는 입찰제도를 재설계하는 법안을 합의해 통과시켰다. 시장 전력 가격이 기준가보다 낮으면 정부가 차액을 보전해주고, 가격이 높으면 정부가 개발사로부터 초과이익을 환수하는 ‘차액결제계약(CfD·Contracts for Difference)’을 통해 개발사에게 안정적 수익을 보장하고, 보조금 제도를 부활시켰다. 건설 기간이 지연될 경우 부과했던 벌금을 낮춰 개발사의 부담을 줄여주기도 했다. 다시, 입찰에 손을 드는 개발사들이 등장했다.
미켈 빈터 헨릭센 DEA 해상풍력 부서장은 이러한 제도적 노력이 “시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 현재 덴마크의 해상풍력 정책 목표는 탄소감축을 넘어서 에너지 안보와 화석연료 의존도 축소, 설비용량 목표 달성, 이웃 나라와의 연계 같은 시스템 통합의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에너지전환은 보조적 정책 수단이 아닌 국가의 법적 의무다. 2020년 실행된 ‘덴마크 기후법(Climate Act)’에 따르면 덴마크 정부는 2045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해야 한다. 에너지기후부 장관은 매년 감축 이행 상황을 보고하고, 목표 달성이 불투명할 경우 추가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법적 의무를 진다.
기후정책의 ‘파수꾼’으로 불리는, 정부로부터 독립된 과학 자문기구 ‘기후위원회(Klimarådet)’ 역시 에너지 정책에 대한 정치적 합의의 산물이다. 기후위원회는 기후법을 근거로 별도 예산을 편성받고 법적으로 보장된 권한을 갖는다.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된 기후위원회는 매해 정부의 탄소감축 목표 달성 의지와 수단을 평가 및 감시한다. 기후위원회의 연례 평가는 덴마크 기후법의 일부이므로, 매년 기후정책을 수립할 때 핵심 쟁점이 된다. 덴마크 기후위원회는 설립 10주년을 맞은 지난해, 산업·환경·노동 분야 40여 개 관련 단체들에 평판 분석을 의뢰했다. 10점 만점에 신뢰도는 8.8, 전문성·독립성·투명성은 모두 9점 이상을 얻으며 ‘모범생’다운 성적을 거뒀다.
“최근 덴마크는 EU 최초로 농업 분야에 탄소세를 도입했는데 기후위원회도 권고한 것이다. 이런 결정들은 때로 논쟁을 일으킨다. 그래서 기후위원회에는 과학자만 있지 않고 사회학자, 경제학자 등도 함께한다. 단순히 ‘저렴한 탄소중립’이 아니라 ‘공정한 탄소중립’을 위한 제도를 설계하기 위해 무엇이 공정한지 묻고 그 감각을 제도에 담으려 한다. 핵심은 ‘당신은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해결책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각각의 기여 위에서 ‘녹색 전환’을 어떻게 ‘수확’해 공동 편익을 얻을지 논의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에너지시스템 전문가이자 기후위원회 소속인 마리 뮌스테르 덴마크 공과대학 교수가 말했다.
이런 초당적 합의 위에서 덴마크는 2030년 해상풍력 발전 용량을 14GW까지, 2050년 52GW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라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리스크를 함께 공유하는 관리자이자 조력자로 시장의 신뢰를 얻고 있다.
반면 덴마크와 이웃한 스웨덴은 ‘정권교체에 영향을 받는’ 에너지 정책으로 재생에너지 확대가 위축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지난해, 에너지 정책 자문기구 ‘그린파워 스웨덴(Green Power Sweden)’은 스웨덴의 풍력발전 투자 여건이 악화돼 2027년 이후 사업 확장이 멈출 수 있다는 이른바 ‘2027 절벽(cliff)’을 예고한 분기 보고서를 발표하며 시장에 충격을 던졌다. 그린파워 스웨덴의 안톤 요한손 시장분석 부서장은 스웨덴 정부가 SMR(소형 모듈 원자로) 같은 신규 원전을 확대하기 위해 기존 원전과 수력, 풍력 등에는 적용하지 않는 ‘국가보증 대출’과 수익안정화 정책 등을 확대하고 있다며, 그 이유로 우파 성향의 정치세력들이 ‘원전 확대’를 공통 의제로 선택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 정치인은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원자력은 안정적인 기저 전원(일일 최소 수요를 담당하는 발전원)이고, 재생에너지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한손 부서장은 이를 반박한다. “지난 몇 년간 재생에너지는 전력 수요 증가를 상당 부분 채울 역량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예컨대 풍력의 연간 발전량은 최근 7년 동안 20TWh에서 40TWh로 두 배나 성장했다. 풍력과 상호보완적 발전원인 태양광, 에너지 저장장치인 배터리 분야도 급성장 중이다. 스웨덴은 2040년부터 2045년까지 전력 소비가 300TWh 이상 될 것이라 예상하는데,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하고 현실적인 선택지가 재생에너지다. SMR 같은 신규 원전으로는 절대 전력 증가분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뿐만 아니라 경직성 전원인 원자력의 경우 전력 생산량에 변동성이 큰 재생에너지와 상호 배타적 관계다. 재생에너지를 확대하겠다는 장기 목표와 원자력 확대는 공존하기 힘들다는 것이 안톤 요한손 부서장의 설명이다. 재생에너지의 전력 생산량에 따라 원전의 가동을 조절하는 출력 제어를 해야 하는데 이 경우 발전비용이 증가하고, 안전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다. 요한손 부서장은 지속 가능한 재생에너지 발전원들이 서로를 보완하는 그래프를 보여주며 이렇게 설명했다. “파란색은 추운 계절, 빨간색은 따뜻한 계절을 뜻한다. 따뜻할 때는 태양광 발전 량이 높게 올라간다. 반면 추울 때는 풍력발전 량이 두드러진다. 이 그래프에서 두 발전원의 상관계수는 -0.3으로 음의 관계다. 태양광 발전 량이 적을수록 풍력발전 량이 많아지고 반대로 태양광 발전 량이 많을수록 풍력발전 량이 적어진다는 의미다. 즉, 두 발전 방식이 서로를 보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림 1〉 참조).”
대규모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해상풍력과 지산지소(지역에서 생산해 지역에서 소비)에 적합한 태양광, 그리고 전기를 저장했다 필요할 때 꺼내쓰는 ESS같은 배터리 기술 등을 통해 ‘녹색 기저 전원’이라는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다. 덴마크는 화석연료와 원자력이 아닌, 자국에서 생산할 수 있고 낮은 발전단가로 가격경쟁력을 갖춘 재생에너지를 통해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를 지킬 수 있다는 사회적 대타협을 법제화했다. 이 같은 토대 위에서 집행되는 일관된 재생에너지 정책을 통해 덴마크 시민들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를 함께 만들고 있다는 공동체 의식을 익힌다.
아래로부터의 에너지 민주주의
재생에너지는 민주주의를 양분 삼아 자란다. 재생에너지가 확대된다는 것은 정부로부터 독점된 에너지 권력을 다양한 시민들이 나눠 갖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도, 노인도 모두 에너지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마을 도서관과 공터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생산·판매한 수익으로 주민들이 다 같이 밥을 나눠 먹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라도 집에 지열 히트펌프를 설치해 스스로 냉난방을 해결하며 에너지 자립을 할 수도 있다. 여기서 의문 하나. 거대한 자본이 투입되는 해상풍력에서도 기업이 아닌 주민들이 바람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주민 8500명이 발전기 10기를 100% 소유하고 있는 ‘미델그룬덴’의 역사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매년 6월 둘째 주 일요일. 코펜하겐 앞바다에 특별한 소풍을 가려는 사람들이 모인다. 미델그룬덴 조합원 가족들이 ‘나의 발전기’를 직접 보기 위해 항구에서 배를 타고 투어를 떠나는 날이다. 매년 여름마다 500명 정도의 조합원들이 ‘풍력 피크닉’에 참여한다.
소풍 나온 어린이 중 일부는 이미 터빈의 주인이기도 하다. 미델그룬덴 풍력발전의 조합 지분은 대부분 시장에 판매하지 않고 자녀와 손자·손녀에게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에릭 크리스티안센 미델그룬덴 협동조합 의장은 조합원들이 풍력발전 지분을 ‘가보’처럼 아끼는 이유를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미델그룬덴 풍력단지는 코펜하겐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협동조합 주민들은 언제든 그것을 보며 ‘저기서 깨끗한 전기를 만드는 풍력발전 단지가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체감한다. 미델그룬덴의 지분을 시장에 판매하지 않고 가족들에게 선물하는 이유다.” 덴마크 사회가 함께 나아가기로 약속한 미래를 후대로 이어주는 것이다.
1997년 미델그룬덴 프로젝트가 처음 발을 뗐을 때부터 의장직을 맡아온 에릭 크리스티안센은 30년 덴마크 해상풍력 역사를 직접 만들어온 당사자이기도 하다. 덴마크에서 시민들은 반핵운동 등을 통해 스스로 재생에너지를 미래의 대안으로 선택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풍력·태양광 협동조합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거대 자본과 기술력이 필요한 해상풍력 협동조합은 시작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협동조합 전통이 강한 덴마크의 문화를 기반으로 “에너지도 시민들이 직접 소유하고 운영할 수 있다. 많은 자본이 필요한 해상풍력까지도!”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전력 인프라를 구축하는 유틸리티 업체를 마음 맞는 이들끼리 찾아갔을 때는 터무니없다는 핀잔을 들었다. ‘평범한 시민들은 전기를 다룰 수 없다. 우리 같은 전문가들만 다룰 수 있다’라는 말에 다들 실망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시장을 설득하고, 조합에 참여하지 않는 시민들을 초대해 공청회를 열었다.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아 발전기의 개수를 줄이고 일렬로 세우려던 발전기 배치를 조경협회와 상의해 부채꼴 모양으로 수정하기도 했다. 1999년 여름, 연말까지 5%의 지분을 더 팔아야 한다는 소식에 지역 언론과, 유명 배우, 예술가들이 지분 참여를 독려하고 스스로 조합에 가입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덴마크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주민 참여 풍력발전 단지가 도심 연안에 세워졌다.
주민이 소유한 10개 발전기 중 하나는 7세부터 18세 사이의 ‘지분은 있지만 총회 의결권 행사 연령을 넘지 못한’ 조합원을 위한 ‘어린이와 청년 발전기’로 운영한다. 발전기에는 미래 에너지의 주인인 어린이들이 남긴 서로 다른 높이의 핸드프린팅 자국이 가득하다. “주민들이 함께 발전소를 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함께할 동료를 찾고, 조직을 만들고, 민주주의를 작동시켜 사람들을 설득하는 문제다. 조합원들은 돈만 투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속감을 갖고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배운다. 협동조합이 무엇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이렇게 큰 시스템을 시민들이 스스로 운영할 수 있고 거대한 자본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민주주의라는 효능감을 배우는 것이다.”
에릭 크리스티안센 의장은 재생에너지가 확산되면서 유럽 내에서도 공공기관(지방정부)과 시민, 지역 기업이 협업해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는 방안이 빠른 속도로 논의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EU는 2019년 ‘모든 유럽인을 위한 청정에너지 패키지(CEP)’를 통해 2050년까지 유럽 시민 절반이 전체 재생에너지의 최대 50%를 직접 생산하는 시스템을 목표로 시민 중심의 재생에너지 커뮤니티 도입을 촉진하고 있다. 공동체가 저렴하게 에너지를 생산함으로써 에너지 빈곤을 해결하고, 에너지 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을 제고해 수용성을 높이고, 무엇보다 환경·사회적 가치를 민주적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 지역 안에서 배워나가게 하기 위해서다.
모르텐 베스테르고르 ‘덴마크 에너지커뮤니티 전국협회’ 의장은 덴마크 지방정부 최초로 미델파르트시가 도입한 기후실장직을 맡고 있다. 인구 4만명의 작은 도시 미델파르트는 덴마크 기후 선도 도시로 유명하다. 그는 행정 거버넌스 안에 ‘기후 영향’에 대한 평가와 대책이 반드시 들어가도록 하는 ‘기후행동 계획’을 설계했다. 농부·교육자·기업가 등 다양한 시민이 탄소중립 실천을 위한 시의 계획 수립 단계부터 참여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행동들을 논의하고 약속하는 것 역시 미델파르트시의 독특한 행정 문화다. 달리기 모임, 독서 모임처럼 시민들은 탄소중립에 대한 자발적인 아이디어를 모으는 ‘사회 모임’을 만든다.
이곳에서는 매해 8월, 정치인과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모여 축제를 열고 기후 문제를 논의하는 ‘기후 시민 회의(Klimafolkemødet)’가 열린다. 내 옆의 평범한 이웃을 추천해 상을 주는 ‘환경영웅 시상식’도 빼놓을 수 없는 지역 축제다. 모르텐 베스테르고르 의장은 사람들은 크게 4가지 이유로 에너지 문제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덴마크어로 K가 4개다. 기후(klimat), 돈(konsum), 사랑(kærlighed), 전쟁(krig). ‘사랑’은 사람들과 함께 어떤 일을 도모하는 사회적 즐거움과 동기를 말한다. ‘전쟁’은 최근의 에너지 안보위기 속에서 에너지 지역 생산이 중요해진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지만 에너지 커뮤니티는 ‘보상’이 아니라 ‘참여’를 말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스스로 아이디어를 갖고, 시장에서 만난 이웃에게 같이 뭔가를 해보자고 말을 건다. 내 이웃이 하는 일에 나도 같이하고 싶다고 문을 두드리게 된다. 미래의 에너지는 바로 이런 일상 안에서 스파크(촉진)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