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에서 반려로, 반려 다음 우리는 함께 사는 존재를 무어라 부르게 될까요. 우리는 모두 ‘임시적’ 존재입니다. 나 아닌 존재를, 존재가 존재를 보듬는 순간들을 모았습니다.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물고기’라는 범주가 생물학적으로 허구임을 폭로했다. 예컨대 폐어는 유전적으로 연어보다 지상의 소와 더 가깝다. ‘물고기’라는 단어는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는 이름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을 활용하기 위해 편의상 묶어버린 게으른 라벨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잡초의 정의는 주로 농작물의 영양소를 뺏는 식물 혹은 ‘인간이 원하지 않는 곳에 난 식물’이다. 이 논리를 우리 삶에 그대로 대입한다면 인간의 생존과 편의에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모든 존재를 ‘잡다한 것’으로 규정해버리는 셈이 된다.
산불이 지나간 지 한두 달 된 산을 걷다 보면 시커멓게 타버린 나무 밑동에서 솟아 나오는 연한 초록색 싹들을 보게 된다. 종종 이들은 ‘잡목’이라 불리기도 하고 이런 숲을 ‘불량림’이라 치부하기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위기의 순간에 나무가 선택한 가장 위대한 생존 전략인 ‘맹아’다.
나무는 평소 줄기 껍질 아래나 뿌리 근처에 ‘잠아(잠자는 눈)’라 불리는 조직을 숨겨둔다. 본체가 파괴되는 재난의 순간, 나무는 뿌리에 비축해둔 모든 생명 에너지를 이 잠자던 눈에 쏟아붓는다. 씨앗이 땅에 내려앉아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찾는 데 수년이 걸릴 때, 맹아는 이미 구축된 거대한 ‘자연자본(뿌리 시스템)’을 물려받아 압도적인 속도로 자라난다.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풀떼기처럼 보여도 곧 덤불이 되고 숲의 기둥으로 거듭난다. 그것은 단순한 새싹이 아니라 숲이 수십 년간 쌓아온 기억과 에너지가 폭발하는 경이로운 재건의 현장이다.

맹아는 정적만 흐르는 죽은 산에 가장 먼저 ‘무료 급식소’를 차린다. 수분이 많고 영양가가 높은 맹아는 고라니와 토끼에게 최고의 영양식이 된다. 동물이 모여 배설하며 땅이 비옥해지면 곤충과 애벌레가 깃들고, 이들을 먹기 위해 새들이 돌아온다. 새소리가 들리면 상위 포식자들도 다시 숲을 찾는다. 인간의 눈에는 이름 없는 풀들의 엉킴일지 모르나 그 하나하나가 모여 멈췄던 생태계의 시계태엽을 돌린다. 맹아는 강한 햇볕을 막아 다른 씨앗들을 보호하는 ‘파라솔’이 되어주며, 숲의 천이(遷移) 과정을 진두지휘하는 현장소장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당장 눈에 보이는 금전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무언가의 가능성을 ‘잡초’라 부르며 뽑아내려 한다. 관광업으로 이윤을 남기려는 사람에게 숲은 케이블카 설치를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일 뿐이고, 제조업의 효율을 따지는 이에게 공장 부지를 차지한 소나무는 땔감 수준의 장작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구절처럼 생명의 가치는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다. 맹아가 그렇듯, 우리 삶의 모든 ‘잡초’ 같은 순간이 그러하다. 이름을 지우고 자세히 들여다볼 때 우리는 비로소 그곳에서 세상을 지탱하는 거대한 생명의 벽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쌓아 올리는 벽돌들이 결국 대자연의 기초가 되고, 인간이 배출한 과도한 탄소를 흡수하며 우리의 생존을 지속 가능하게 한다.
잡초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생명을 유지시키려는 치열한 의지와, 그것을 다 읽어내지 못하는 우리의 좁은 시야가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