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츠를 타고 떠돌던 ‘중국 관련’ 가짜뉴스가 역사 수업 시간에 재현되었다. 한 언론사의 팩트체크 기사를 띄우자 학생은 “그건 좌파 언론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배재고 야구부 응원 구호 사건으로 촉발된 ‘교실의 극우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사회적 논의가 무성한 가운데 교육의 주체로서 교사들은 어떤 고민을 안고 있을까. 〈시사IN〉은 교실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분투하는 두 역사 교사의 글을 싣는다.
“저도 민주당 지지할 테니까 이제 그만 말하세요.” 중학교 2학년 남학생 A의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50분가량 이어진 학생과의 언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지난해 가을 중국인 단체 관광객 무비자 입국이 시행된 다음 날이었다.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A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리고 ‘(무비자 입국으로) 중국인들이 몰려와 범죄를 저지를 것 같아 불안하다’고 외쳤다. 여기저기서 ‘밤길을 조심해야 한다’ ‘장기를 털린다’는 웅성거림과 낄낄거림이 함께 들렸다. 릴스와 쇼츠를 타고 떠돌던 가짜뉴스가 4교시 역사 수업 시간에 재현된 것이다.
15년 차 역사 교사인 나는 민감한 주제를 굳이 피하지 않는 편이다. 민감한 주제일수록 학생들의 삶과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고 그 부담스러움 뒤에 숨은 에너지를 좋은 수업의 동력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직전 주말, 대림동을 찾아온 혐중 시위대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맞불 집회에 다녀온 참이었다. 학교, 시민단체, 교사 공동체가 함께한 이 연대의 흔적이 없었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끄럽게 남았을까. 그런 고민을 하며 돌아왔는데 정작 교실이 또 다른 전장이 되어 있었다.

그날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까닭


학생의 돌발 발언을 유연하게 넘기지 못한 건 온전히 나의 정념 탓이다. 처음엔 그저 학생들이 혐오적 언어를 멈추고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다는 당부 정도를 남기려 했다. 중국을 싫어하는 것은 개인의 평가이고 감정이지만, 집단을 특정화해 규정하는 것은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역사 속에서 유대인과 재일조선인이 받은 차별을 사례로 들어보았다. 그런데 대화가 잘 풀리지 않았다. 중국인을 포함해 외국인 범죄 비율이 내국인보다 낮다는 통계를 제시해 논리적 모순을 짚은 것은 물론 각종 수사와 논파의 기술을 동원했다. 논객이라면 꽤 날카로웠을 논증이었다. 문제는 내가 논객이 아니라 그 학생의 담임이었다는 것이다.
한 언론사의 팩트체크 기사를 띄우자 학생은 “그건 좌파 언론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출처를 확인하고 매체 등 채널의 경향성을 검토하는 것, 우리가 ‘리터러시(문해력)’라 부르며 강조해온 바로 그것이었다. 학생은 정보가 부족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자기 렌즈에 맞지 않는 정보를 소음으로 처리하는 법을 그 학생은 이미 익히고 있었다. 교실은 링이 되었다. 로프에 몰린 상대를 압박하다 종이 울렸고, 그 학생을 따로 불러 다독이려던 자리에서 앞서 말한 문제의 발언이 나오고야 말았다. 그날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교실이 민감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달라진 것은 양상이다. 불법적인 12·3 비상계엄 이후, 인권과 평화와 민주주의 등 보편적 가치로 합의된 것들이 일부 학생에게는 특정 정파의 논리로 받아들이는 듯한 징후가 확인된다. 12·3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을 헌정 질서의 문제가 아닌 특정 정당 지지나 정치인의 유불리 문제로 보는 학생을 오늘날 교실에선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얼마 뒤 나는 반성문을 썼다. 교사 공동체인 ‘전국역사교사모임’ 회보에 그날 학생과의 대화를 돌아보는 글을 썼다. 교사로서 학생에게 패배를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학생이 스스로의 발언을 돌이켜볼 안전한 환경을 제공했는지 되짚어보았다. 〈유네스코 교육의 미래 보고서-함께 그려보는 우리의 미래(2021)〉에서는 “모든 교육 환경은 안전한 장소, 나아가 피난처가 되어야 하며 (···) 교육자는 학생이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판단당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학습 환경을 마련하도록 애써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마치 나와 학생의 대화를 지켜본 누군가가 이를 질책하며 적은 구절처럼 읽혔다.
그 후 A 학생과의 관계 회복에 집중했다. 학년이 바뀌더라도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A 학생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 듯했다. 평소 수평적인 분위기를 허용해왔다고 여겼지만 공개된 자리에서 논박당한 일이 상처가 컸을 것이다. 나는 그날의 지도에 대해 사과했다. 교사로서 그날의 발화나 교육적 의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이 학생의 변화를 돕는 방식이 아니라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이 부끄러웠다. A 학생의 보호자와도 여러 차례 통화하며 상의했다. 보호자는 A 학생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줄 몰랐다며 걱정했고, 나는 학생의 성장을 돕고 지지하는 입장에서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이러한 노력을 알아준 것일까. 종업식 날 A 학생은 먼저 포옹을 청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학생의 용서로 나의 죄책감을 구원받는 순간이었다.
3학년으로 진급하면서 나와 헤어진 A 학생은 뜻밖에 내가 지도교사를 맡은 동아리에 지원했다. 사회참여 프로젝트 활동을 하는 이 동아리는 지원자들에 한해 선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데, 나와의 인연을 다시 잇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셈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고, 그 사이 갈등과 다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제가 더 성장할 수 있었기에 다시 한번 더 배우고 싶다.” 지원서에 적힌 이 문장은 내게 여러 질문을 남겼다. 논리의 제시나 당위적 교화가 아니라 대안적 서사와 세계관을 접한 학생이 스스로 묻고 돌아보게 하는 수업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때 〈시사IN〉의 ‘‘혐중’에 맞선 어느 중학교 이야기’ 커버스토리 기사를 알게 되었다. 혐오의 시대를 목도하던 시민들, 특히 교사들에게 위안과 용기가 되었다. 혐오 선동을 멈춰 세우는 건 논리적인 반박이 아니라 이처럼 정동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즈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직접 만나면 다르지 않을까.’
기사에 등장하는 각색교사모임에 도움을 청했다. 서울 영등포구·구로구·금천구 일대에서 이주 배경 학생의 통합교육을 고민해온 교사 모임이다. 자칫 무례할 수 있는 부탁에도 이들은 동료 교사의 간곡한 제안을 차분히 들어주었다. 각색교사모임의 구성원인 한채민 교사는 이런 조언을 건넸다. “선주민(한국인)에, 비청소년에, 학생도 아닌 교사에게 질문을 받는데 솔직한 대답이 나올까요? 피해자 프레임의 질문을 반복해서 받는 것도 당사자는 원치 않을 수 있어요.” 프로젝트 내내 고심과 성찰을 거듭했고, 최대한 학생들끼리의 만남에 집중하기로 했다.
근무하는 학교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이면 대림역이다. 하안북중 학생 세 명과 대림중앙시장을 한 바퀴 구경하고 혐오 시위가 벌어진 장소를 방문했다. 근처 식당에서 동북식 궈바오러우와 어향가지로 점심을 먹었다. 그 일대 상점과 학원에서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대림중앙시장을 특별한 장소로 상상했던 나의 시선도, 이주 배경 학생은 어디서 무얼하며 지낼까 하던 궁금증도, 결국 일종의 대상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에서 각색교사모임의 교사, 이주 배경 학생, 나와 동행한 선주민 학생 셋이 빙수를 두고 앉아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이 들려준 에피소드에는 오늘날 문화다양성 교육의 여러 고민이 겹쳐 있었다.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르며 정체성의 혼란·고민·수용의 과정을 거쳤다는 학생 이야기, ‘저 친구 입장에서는 중국어가 우리말일 수도 있어요’라는 학생의 말에 반성했다는 교사의 성찰 등. 대부분의 시간은 서로 좋아하는 아이돌에 대해 수다를 떠느라 여념이 없었다. 헤어질 무렵 학생들은 “다음엔 우리 학교에서 만나자”라며 인사를 나눴다. 학생들을 집에 돌려보내고 혼자 걷는데,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날 두 학교 학생들의 대화를 촬영한 영상을 편집해 프로젝트 수업의 주제 영상으로 사용했다. A 학생을 포함한 동아리 학생들이 이 영상의 촬영과 편집, 검수에 함께 참여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영상을 보고 낄낄대거나 불만을 표현하는 학생들은 없었다. 영상이 혐오 시위가 문제라는 반박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삶과 대화 자체를 담아낸 장면이 학생들의 마음에 다가갔을 것이라 추측한다. 15년 교직 생활의 경험치로도 학생들의 반응이 이례적인 것은 분명했다.

교직 생활 첫 ‘국민신문고 민원’


그리고 올 것이 왔다. 교직 생활 처음으로 국민신문고 민원을 받았다. 프로젝트가 끝난 지 3주 뒤였다. 민원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극우세력의) 대림동 집회는 혐오 시위가 아니라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집회인데 왜 교사의 정치적 편향을 강요하는 수업을 했는가”라는 것이다.
수업을 설계하고 이끌 권리는 교사에게 있고 법률로 보장되었다. 그러나 학생과 보호자도 수업에 대한 의견을 낼 권리가 있다. 그들에게 설명하는 일 역시 수업 전문성의 일부라고 나는 믿는다. 그날 새벽 2시까지 여덟 장의 사유서를 썼다. 이 수업이 교육과정과 법령 어느 부분에 근거하는지, 혐오 시위라는 규정이 어떤 기준에서 나온 것인지, 프로젝트 수업을 위해 교사인 내가 마련한 교육적 장치가 무엇인지 등을 촘촘히 설명했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 제기의 여지를 줄 수 있다’는 등 조언이 이어졌고, 오랜 고심 끝에 “민원 사항을 잘 인지했으며 다음 기회에 유념 및 참고하겠다”라는 취지로 갈음했다. 사유서 원본은 장학사에게 꼭 전달해달라고 당부했다.

점점 대화가 어려워지는 교실 안에서 교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12·3 비상계엄을 옹호하는 학생과 여러 달 대화를 이어간 역사 교사 맹수용은 〈계엄, 내란 그리고 민주주의〉(역사비평사)에서 대안을 모색한다. 학생의 주장을 섣불리 논파하지 않고 끝까지 들으며 대화를 이어갔고, 서로의 신뢰를 유지하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교실이 학습자가 판단당할 두려움 없이 자기 생각을 꺼낼 수 있는 공간이 될 때 비로소 학생의 성찰도 시작된다는 가르침을 준다. 이 자체가 곧 민주주의를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
오늘날 교실의 실태에 개탄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극우 학생’일지라도 교사는 그들과 일상을 공유하고 그들을 지지, 응원하며 성장을 도와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민주시민 교육과 역사 교육을 얼마나 더 많이 해야 할까’보다 ‘어떻게 이들과 대화해야 할까’를 더 치열하게 토론해야 한다. 많은 교사들이 쉽지 않은 환경에서 학교를 교육적 공간으로 보듬어나가려 애쓰고 있다. 우리 사회가 학생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교사의 모색과 노력에 신뢰를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배움과 성장이 한 번의 각성으로 이뤄지진 않는다. ‘민주시민’은 길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극우’ 학생도 구출과 교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교사는 학생에게 종착역이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지만 난 간이역이라 생각한다”라는 말에 한 동료 교사는 “간이역보다는 더 큰 역할이지 않을까? 환승역 정도로 하자”라고 제안했다. 환승역이라는 표현이 자조적이거나 낙심으로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