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으로 풀어야 한다’는 말은 뜬구름 잡는 소리일까? 배재고 사태를 두고 학생들과 토론을 진행해본 한 역사 교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교실 속 성숙한 공론장은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배재고 야구부 응원 구호 사건으로 촉발된 ‘교실의 극우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사회적 논의가 무성하지만 교육의 주체로서 교사들은 어떤 고민을 안고 있을까. 〈시사IN〉은 교실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분투하는 두 역사 교사의 글을 싣는다.
6월29일 배재고 야구부 학생 선수들이 광주일고와의 경기에서 상대 더그아웃을 향해 “가야지, 가야지,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등 구호를 외쳐 논란을 빚었다. 학생들은 이번 논란을 어떻게 지켜봤을까? 역사 교사로서 흥미로운 문제였다.
마침 반에 학생 선수가 있었다. 그 학생에게 아는 만큼만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학생 선수로서 ‘출전정지 6개월’이 가지는 의미를 친구들에게 설명했다. “배재고 소속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진로가 막힐 수 있다.” 친구들은 마치 당사자의 설명을 듣듯 학생에게 집중했다. 나는 칠판에 세 가지 입장을 제시했다. ‘지나치게 잘못된 행동이었다.’ ‘잘못은 맞지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경기 중에는 있을 수 있는 행동이다.’ 여기에 배재고 야구부에 내려진 6개월 출전정지 징계가 타당한지도 함께 물었다. 입장은 언제든 바뀌어도 된다는 규칙도 일러뒀다.
사회 현안으로 토론 수업을 할 때면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학생들은 현안에 관심이 많고 반응도 빠르다. 어떤 학생은 “고등학생이면 아직 어리니까 실수할 수 있다”라고 했고, 또 어떤 학생은 “고3 선수에게 6개월은 한 시즌 전체이자 진학 기회를 잃는 과한 징계”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한편에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6개월도 짧다.” “국가대표나 유명 선수가 될 수도 있는 학생들이라면 오히려 자신의 말이 미칠 영향을 더 생각했어야 한다”라는 지적이 나왔다. 한 학생은 “스포츠 경기 어디에서나 상대 선수의 멘털을 흔들려고 한다. 이번 일이 문제가 된 건 투수를 흔들어서가 아니라, 5·18을 조롱하는 문구를 썼기 때문 아닌가?”라고 물었다.
“새로운 질문이 나왔네요. 이번에는 5·18을 조롱의 소재로 쓴 것, 더 넓게는 역사적 비극을 조롱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교실에 침묵이 흘렀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5·18은 여러분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라 멀게 느껴질 수 있어요.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태어난 이후에 벌어진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처럼, 누군가에게 여전히 슬픔으로 남아 있는 일을 조롱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역사적 비극과 타인의 슬픔을 조롱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학생들의 손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다른 학급에서도 같은 주제로 토론장을 열었다. 어떤 교실에서는 “역사적 비극을 조롱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기준은 중요하지만,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 아직 보호받아야 할 학생을 본보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이 호응을 얻었다. 반면 다른 학급에서는 재발을 막고 사회적 기준을 분명히 하려면 책임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수업 뒤 학생들에게 후기를 받았다. 징계 수위가 타당한지를 두고는 끝내 생각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지만, 학생 대부분이 역사적 비극이나 타인의 슬픔을 밈이나 농담, 응원 구호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 결론을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도, 함께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선을 찾은 셈이다.
학생들이 남긴 평가는 입체적이었다. 학생들은 배재고 학생 선수만을 놓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건을 다룬 우리 사회의 방식도 함께 평가했다. 온라인에서 벌어진 마녀사냥, 일부 선수의 잘못을 학교 전체에까지 덧씌운 낙인, 학생들을 진영 대결과 비난의 소재로 삼은 일부 어른과 정치권의 모습까지 비판했다. 한 학생은 일방적인 비난과 지나치게 무거운 징계가 오히려 학생들의 반발심을 키울 수 있다고 썼다.

“우리도 의견을 표현할 기회가 필요하다”


사회 현안을 소재로 토론 수업을 해온 지는 꽤 오래됐다. 한국사 수업의 기본 흐름도 토론 활동을 중심으로 설계하는 편이다. 한번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학생이 있어서 토론의 판을 열었다. 수업이라는 공식 공간에서 토론이 시작되자, 그동안 친구의 주장에 잠자코 있던 학생들도 굳이 맞서지 않았을 뿐이라는 듯 말을 꺼냈다. 겉으로 발언하지 않은 학생들도 수업 뒤 후기를 받아보면 친구들의 의견을 들으며 자신의 판단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수업이라는 공론장을 통해 이런 생각을 이끌어냈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지만 사회 현안을 다루는 토론은 교사에게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정치적 편향’이라는 민원에 휘말리기 쉽기 때문이다. 현재와 먼 과거의 사건을 다룰 때는 배경지식을 쌓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지금 뉴스와 온라인을 달구는 현안에는 학생들도 자신의 경험과 가치판단을 끌어오며 빠르게 반응한다. 교육적으로 더 풍성한 토론이 가능한 주제일수록, 교사가 감수해야 할 위험도 커진다.
수업 중 위험을 감지한 순간이 몇 차례 있었다. 친일재산환수법이 사회적 쟁점이었을 때, 친일 행위로 형성되어 후손에게 상속된 재산을 국가가 환수하는 문제를 놓고 찬반 토론을 했다. 한 학생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친일파의 후손에게도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한마디가 교실을 압도했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도록 학생들에게 거듭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학생들의 논의가 사실을 명백히 왜곡하거나 타인의 존엄과 기본권을 부정하는 등 반사회적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가장 곤란하다.

중요한 쟁점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채 결론이 굳어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내가 직접 반론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주도권을 장악한 학생은 쉬이 물러서지 않았고, 어느새 교사와 학생이 일대일로 맞서 논쟁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수업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장면이었다. 정면 논쟁을 더 이어가는 대신 다른 학급에서 나온 의견을 소개하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민원은 없었지만, 교사가 정치적 생각을 강요했다는 항의가 들어오지 않을까 한동안 마음이 불편했다. 교사가 두려워하는 것은 논쟁적 주제가 아니라, 사회자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해 교육적 책임을 지고 토론자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이번 응원 구호 논란을 다루는 많은 보도에서 교육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정작 교사들은 민원과 고소가 두려워 이런 사안을 수업에서 다루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함께 실린다. 한편에서는 현안을 적극적으로 교실에서 토론하라고 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교사가 교육적 책임을 다해 발언하는 순간을 ‘편향’과 ‘주입’으로 의심한다. 이 간극을 그대로 둔 채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그 책임을 교사 개인의 용기에 떠넘기는 일이다.

독일 정치교육의 ‘보이텔스바흐 합의’


올해 1월 교육부는 ‘2026년 민주시민교육 추진계획’을 발표하고, 최근 국가교육위원회에서 ‘학교시민교육 국가 기본원칙(안)(기본원칙)’을 공개했다. ‘기본원칙’은 전문에서 독일 정치교육의 기준으로 자리 잡은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거울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①주입이나 교화를 금지하는 원칙 ②사회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을 교실에서도 논쟁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원칙 ③학생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판단하고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독일의 정치교육에서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교사가 아무런 입장도 밝혀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아니다. 금지되는 것은 교사가 자신의 견해를 학생에게 강요하는 일이지, 견해를 말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이처럼 판단의 기준은, 교사가 의견을 밝혔는지가 아니라 다른 관점을 숨기지는 않았는지, 학생이 반대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는지, 평가권과 권위를 이용해 특정한 답을 선택하도록 압박하지 않았는지 등이다.

앞의 친일 재산 환수 토론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내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친일 행위자의 후손에게도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있다는 점에 동의해요. 그렇다면 그 권리는 어떤 경우에도 제한될 수 없는지, 그 재산이 친일 행위의 대가로 형성됐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함께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선생님은 친일 재산 환수를 과거의 누군가를 다시 벌주는 문제로만 보지는 않아요. 앞으로 우리 공동체가 다시 침탈을 당했을 때 어떤 선택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지 기준을 세우는 사회적 합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는 교사의 답을 따르라는 요구가 아니다. 한 학생의 주장에 가려 충분히 검토되지 못한 사실과 가치를 논의의 장에 다시 올려놓는 일이다. 학생은 교사의 견해에 반박할 수 있고, 다른 근거를 들어 자신의 판단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런 발언까지 주입이라고 부른다면, 교사는 논의가 한쪽 주장에 압도되거나 중요한 가치가 빠진 채 흘러가더라도 사회자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치적 중립이 아니라 교육적 책임의 포기다.
지금보다 성숙한 공론장을 바란다면, 학생들에게 대화의 판을 열어주라고 요구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사실과 근거, 헌법적 가치에 기초한 교사의 개입이 곧바로 정치적 편향이나 주입으로 몰리지 않게 명확한 기준과 보호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교사가 특별한 용기를 내지 않아도 토론의 판을 열 수 있고, 필요한 순간 열린 토론의 판을 지킬 수 있는, 교사가 교육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다행히 이번 ‘학교시민교육 국가 기본원칙’에는 이런 현실을 의식한 흔적이 담겨 있다. 교육 현장에서 교사가 내린 판단을 존중하고, 정당한 학교시민교육 활동을 관련 법령에 따라 보호하며, 교사의 교육활동이 외부의 부당한 압력이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했다. 반가운 변화지만, ‘보호받아야 한다’는 선언만으로 교사가 실제로 느끼는 위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무엇이 정당한 교육적 개입인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분명하지 않고, 민원이나 고소가 제기됐을 때 교사가 혼자 자신의 수업을 소명해야 한다면 교실의 침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