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에 맞춰 연기를 마친 이해인(21)은 얼음 위에 쓰러졌다. 1988년 캘거리 올림픽 당시 ‘카르멘’으로 금메달을 따낸 전설의 카타리나 비트(61·독일)를 오마주한 동작이다. 연이어 자세를 바꾼 이해인은 이번에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웃었다. 힘겨운 여정이 끝났다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해인은 20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기술점수(TES) 74.15점, 예술점수(PCS) 66.34점으로 총 140.49점을 받았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70.07점을 기록한 이해인은 최종 합계 210.56점으로 8위에 올랐다.
함께 출전한 신지아(18)도 11위에 머무르면서 한국은 ‘피겨 여왕’ 김연아(35·2010 밴쿠버 금메달·2014 소치 은메달) 이후 메달을 따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이해인의 선전으로 다섯 대회 연속 여자 싱글 ‘톱10’ 선수를 배출했다. 2018 평창 대회에선 최다빈(26)이 7위, 2022 베이징 대회에선 유영(22)과 김예림(23)이 각각 6위와 9위를 차지했다.
이해인은 먼 길을 돌아 밀라노까지 왔다. 2023년 그는 4대륙선수권 우승과 세계선수권 은메달을 따낸 기대주였다. 김연아 이후 최초의 역사를 썼다. K팝 댄스곡을 따라 추는 활발한 18세 소녀 이해인은 “올림픽에 꼭 서보고 싶다”고 했다. 2024년 5월 이해인은 이탈리아 전지훈련 중 성추행 의혹으로 3년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연인 사이였던 남자 후배와의 관계를 공개한 후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지옥 같은 1년을 보내고 올해 1월 선발전을 통과한 뒤 얼음 위에서 오열했다. 극적으로 밀라노행 티켓을 거머쥔 그는 “불행도, 행복도 영원하지 않다. 힘들 때 ‘여기에서 반드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시련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 카르멘은 집시 무희다. 마음 가는 대로 사랑을 쫓지만 자신에게 집착하는 돈 호세에 살해 당한다. 하지만 이해인은 카르멘을 비극의 주인공이 아닌 자기 주도적 캐릭터로 해석했다. 이해인이 ‘하바네라’에 맞춰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본 비트는 “나와는 다르지만 매력적”이라고 칭찬했다.
우여곡절 끝에 출전한 첫 올림픽 무대를 좋은 성적으로 마친 이해인은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며 “그동안 큰 힘을 주신 엄마와 함께 오늘 피스타치오 젤라토를 먹으러 갈 것”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이탈리아인들이 사랑하는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쓰디쓴 고난을 이겨낸 그에게 달콤한 젤라토 같은 엔딩이 찾아왔다.